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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자유

황태자의 사색 2022. 2. 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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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자유

중앙일보

입력 2022.02.04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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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자유는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 주춧돌이다.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스스로의 방법을 택하여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진부하게 들린다. 그만큼 자유는 우리의 상식이 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동물과 다르고, 그럴 권리가 있어 존엄하다. 가스라이팅에 분노하고, 극빈 상황에서 허덕이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자유가 박탈되어 존엄이 상처받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명국이 헌법 초두에 신념, 의사표현, 신체, 재산 등에 대한 자유권을 명시적으로 천명하여 인간의 존엄에 예를 표한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신체를 주관하여 자기 뜻대로 처벌할 수 있다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표현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가 강제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권위주의 막는 방파제
극우와 극좌는 개인의 삶 훼손
정파성은 상황을 더 악화시켜
자유의 의미 아는 지도자 필요

자유는 권위주의로의 회귀를 막는 방파제다. 태생부터가 그렇다. 전통적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특권층이 삶의 방식을 결정하였다. 때론 왕과 귀족의 사익이 규범의 옷을 입고, 때론 종교적 세력이 절대자의 명분으로 구성원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자유와 존엄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대항하여 권위주의의 대척점에 섰다.

자유가 인식된 뒤에도 권위주의는 고개를 들어 끈질기게 자유를 위협한다. 자유는 홀로 서 있지 않다. 우리는 기회가 평등하기를, 경쟁이 공정하기를 바란다. 한 사회 속에서 각 개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모래알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살기 원한다. 우리는 자유가 평등, 정의, 사회적 연대 등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성한 사회를 꿈꾼다. 어떤 정치체제가 이들을 가장 이상적으로 조합하는지에 대하여 학자들이 오래 고민해왔지만 아직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합하는 과정에 자유의 폭은 당연히 조절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을 구성하는 자유가 훼손되어 권위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자유는 사회적 연대의 이름으로 공격받기도 한다. 민족을 앞세울 경우 그런 위험이 찾아온다. 히틀러의 나치당과 무솔리니의 공화 파시스트당은 개인보다는 민족을 앞세웠고, 성찰적 이성보다는 민족에 헌신하는 영혼을 강조하였다. 저항 세력은 민족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탄압받았다. 이렇게 극우 파시즘의 통치 하에서 자유와 존엄성이 신음하였다. 민족의 위치에 정의의 이념이 자리해도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한 소비에트의 스탈린 세력은 인민 해방이라는 과도한 평등의 이념을 기치로 내세워 자유권을 박탈하였다. 파시즘과 다를 바 없어 붉은 파시즘이라 불리기도 한다. 양 극단은 만난다고 하던가. 민족을 내세운 극우와 이념을 내세운 극좌는 공히 개인의 자유권과 존엄을 훼손하며 전체주의적 권위주의로 수렴한다.

권위주의로 회귀하여 자유권을 훼손하는 것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위안부 관련 단체에 대한 사실을 적시하며 비판하는 것조차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려 한 ‘위안부 왜곡처벌법’은 민족주의에 기대어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였다. 다수 의석에 기대어 이런 법을 만들려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편향적 위원회를 통하여 역사를 일정 방식으로 해석하려 한다든가, 특정한 해석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법으로 처벌하는 등의 경우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서양에서 극우 세력과 진보 세력에서 나타났던 권위주의적 경향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추고 있어 명시적인 독재의 비난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본권을 훼손하는 권위주의이기는 매한가지다.

개인의 존엄에 대한 의식에서 출발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의식이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 아울러 이념의 절대화와 그에 따른 도덕적 우월성을 경계하여야 한다.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갖고 있는 이들은 상대방의 기본권을 훼손하면서도 그것이 상대방의 해방을 위한 처방이라고 정당화한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국민을 억압한다고 말하는 독재자는 없다. 한결같이 국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처방이라고 말한다.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을 수도, 아니면 권력욕을 위한 구실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국민의 기본권을 해치는 권위주의를 생산한다.

정파성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진영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서로는 서로를 악마화하며, 이는 다시 각자의 신념을 강화시킨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절대적 진리라는 환상을 부추기고, 상대방의 입장은 청취의 대상이 아니라 교정의 대상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이는 결국 정적의 입을 막아 기본적 자유권을 억압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강화한다. 악마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퇴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때론 도덕적 우월의식으로 오염된 정의의 이름으로, 때론 민족의 이름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자유 의식이 정파성에 의하여 더욱 위태로운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 자유의 의미를 읽고, 나의 신념이 절대선이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통찰하는 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한 시점이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