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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원인 찾는 건 인내싸움…쭈그려 앉아 잿더미 발굴, 허리통증 달고 살죠" [W인터뷰]
황태자의 사색
2022. 2. 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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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원인 찾는 건 인내싸움…쭈그려 앉아 잿더미 발굴, 허리통증 달고 살죠" [W인터뷰]
[Weekend Interview] 화재현장 2000곳 출동 이상열 서울강남소방서 화재조사관
- 문광민 기자
- 입력 : 2022.02.04 17:07:05 수정 : 2022.02.04 19: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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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으로 근무한 지난 15년간 화재 현장 출동·조사 건수만 2000건이 넘는다. 화재를 포함해 재난 현장 출동·활동 건수는 6400여 건에 이른다. 현재 서울소방본부 소속 소방관 정원은 총 7389명이며 이 중 화재조사관은 162명뿐이다.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던 어느 오후 이상열 화재조사관에게 잿더미에서 증거물을 발굴하며 꺼진 불과 싸우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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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신고 시점부터 화재조사관의 역할이 시작된다. 화재 현장에선 지휘팀·진압대·구조대·구급대가 각각 임무를 수행한다. 지휘팀은 현장에서 임무를 조율한다. 화재조사관은 지휘팀 소속이다. 현장에 요구조자가 있다면 화재조사관은 연기의 색깔·형태·방향 등을 보고 진입 구역을 판단한다. 화재 진압 작전을 마친 이후 화재 조사가 시작된다.
―진압 후 화재 현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화재 패턴과 발화 지점을 먼저 본다. 연소의 강약을 확인하고, 자연스러운 화재 성장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을 점검한다. 이를 통해 발화 지점을 판정한다. 최초 발화 지점은 화재 진압 시점까지 가장 오랜 시간 연소되고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곳이다.
―화재 원인을 규명하는 판단 원칙은.
▷발화 개연성이 있는 사항을 하나하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한다. CCTV에 발화 상황이 담기거나 확실한 증거가 있는 현장은 드물다. 화재조사관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개연성 있는 원인을 하나씩 지운다. 논리적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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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례다. 가스 조리기구 위에 프라이팬이 타 있다. 배기구를 따라 건물 외부 환풍기가 소실됐다. 환풍기 스위치도 켜진 상태다. 화재 당시 환풍기가 작동 중이었다는 뜻이다. 조리기구 근처를 발화 지점으로 추정한다. 전기 배선 단락(합선)이 있었다면, 이 단락으로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가를 확인한다. 불가능하다면 전기적 원인은 배제한다. 가스 누출로 화재가 발생했다고 가정하고 폭발의 흔적을 살펴본다. 폭발 흔적이 없다면 화재 원인에서 가스 누출도 배제한다. 고의적 방화 여부를 살핀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와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고, 화재 현장에 가연물 배치에 특이 사항이 없다면 고의적 방화도 원인에서 제외한다. 그다음에는 인적 부주의 요소를 살펴본다.
―화재 조사 시 가장 어려운 점은.
▷원인을 규명해도 100% 확신할 수 없다. 모든 화재 현장은 특수성이 있어 재연이 불가능하다. 화재는 실험실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다. 100% 확신할 수는 없더라도 가능한 모든 원인을 배제하고 나면 가장 개연성이 높은 원인을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화재 조사 보고서에는 무엇이 화재 원인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무엇이 원인이라고 '판단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화재 원인을 밝혀냈을 때 소감은.
▷뿌듯하다. 보고서가 화재 예방에 행정적 자료로 사용될 가치가 있을 때 특히 그렇다. 화재 피해자를 도왔을 때 느끼는 감정과는 또 다른 직업적 뿌듯함이다. 2020년 소각 설비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을 규명한 적이 있다. 가장 개연성이 큰 원인은 분진 폭발이었다. 이후 소각 업체들에 분진 폭발의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똑같은 원인의 화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
―발화 원인을 찾는 요령이 있다면.
▷오래 조사한다. 화재 현장에서 바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오늘 보고, 내일 보고, 모레 또 본다. 다시 정리해서 모자란 게 있으면 또 조사한다. 시간을 두고 판단하면 생각이 열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시간을 두고 오랜 기간 연구하고 고민하는 게 요령이라면 요령이다. 오래 걸리는 경우엔 조사 기간이 3개월을 훌쩍 넘는다.
―잿더미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화재 피해자가 측은하다. 인명 피해가 나온 현장은 간접경험 때문에 힘들다. 화재 진압이 끝난 후 현장을 조사하다 보면 이 공간에서 지냈을 누군가의 생활상, 생활수준, 행동 양식 등이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인다. '인생 참 허무하다'는 생각도 더러 든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모든 소방관이 같은 마음이다.
―언제부터 화재조사관으로 근무했나.
▷2013년 7월부터다. 소방공무원으로 임용된 시점은 2007년 12월이다. 처음 1년은 진압대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행정 업무를 4년간 맡았다. 화재 예방 교육 부서에서도 2년 근무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장면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다. 화재 피해자가 사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떻게 사망에 이르렀는지 보고서에 적다 보면 간접경험을 하게 된다. 먹먹해지는 때가 많다.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은 돌이 갓 지난 아기가 사망한 사건이다. 아기는 원래 눕혀진 자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견됐다. 아기가 화염을 피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현장 사진을 보고 있는데 TV 방송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나왔다. 담배를 3대 피우며 마음을 추슬렀다.
―일을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나.
▷없다. 이 일을 하면서 화재 피해자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됐다는 보람된 순간들이 많았다. 화재조사관은 화재 피해자를 최종적으로 보듬어주는 위치에 있다. 제조물 화재 사건에서 제조물에 관한 정보는 제조사가 독점하고 있다. 일반인이 화재 원인을 규명하긴 어렵다. 이때 화재조사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 화재 피해자를 재활센터나 자선단체 등과 이어주는 등 피해 복구를 돕기도 한다. 이런 제 책임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
―화재가 없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나.
▷보고서를 쓴다. 지금은 6건이 밀렸다. 화재가 발생하면 화재조사관은 조사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한다. 보고서에는 화재 원인과 발화 지점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보고서에는 소방 활동 사항, 관계자 진술, 현장 사진 등 화재에 관한 모든 사항을 종합한다. 원인 규명에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보고서를 하나 끝내면 2건의 화재가 추가된다. 출동이 없을 때는 늘 보고서를 쓰고 있다. 보고서는 영구 보관된다.
―직업적 습관이나 직업병이 있다면.
▷어디를 가건 피난구부터 확인한다. 대부분 소방관의 직업적 습관이다. 피난구가 안 보이면 어떻게 피난할지 고민한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도 괜히 걱정한다. '저러면 다칠 텐데.' 사건·사고 현장을 워낙 많이 나가다 보니 위험 요소가 저절로 보인다. 직업적 질병도 있다. 허리가 아프다. 화재 현장에선 쭈그려서 '발굴'한다. 발화 지점으로 판정되는 곳을 조사할 때는 화석을 채취하듯 조심스럽게 살핀다. 짧게는 1~2시간, 길게는 6~8시간 걸린다. 또 화재 증거물 중 부피가 큰 것은 들어서 옮겨야 하고, 화재 잔재물 중 버려야 할 것은 퍼서 버려야 한다. 일일이 손으로 다 한다. 그러다 보면 허리에 무리가 온다.
―겨울철 화재 사고의 공통점은.
▷겨울철에는 화재 신고가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난방을 위해 문을 닫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방문과 창문이 닫힌 채 실내에서 화재가 나면 연기가 밖으로 나가는 데도, 연기가 화염으로 바뀌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외부에서 연기와 화염을 목격하고 신고하기까지도 시간이 지체된다. 그래서 겨울철 화재는 다른 계절에 비해 인명 피해가 더 많다.
―화재 대처 방법을 조언한다면.
▷초등학생들은 소방안전교육에서 배운 대로 움직인다. 초등학생은 화재가 발생하면 방문을 닫고 대피한 뒤 창문 너머로 구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굳이 대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대피하다가 기도 화상을 입는다. 또 방문만 닫고 대피해도 화재 확산이 줄어드는데 방문을 활짝 연 채 대피한다. 적극적으로 소방안전교육을 받으면 좋겠다.
―화재조사관 지망자에게 조언한다면.
▷식지 않는 열정이 필요하다. 열린 사고로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논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 자잘한 화재 현장도 많고, 고된 업무도 많다. 쉬이 질리지 않고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본인에게 자문해보길 바란다. 열린 마음으로 논리적 사고를 하며 쉽게 꺼지지 않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화재조사관은 도전해볼 만한 멋진 직업이다.
▶▶ 이상열 화재조사관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주대에서 건축공학과 역사학을 전공했다. 2007년 12월 소방공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2013년 7월부터 화재조사관으로 일하고 있다. 현 소속은 서울 강남소방서 현장대응단 지휘1팀. 자격증으로는 화재조사관(시행 기관 소방청), 공인화재폭발조사관(CFEI·미국화재조사관협회), 건축기사(산업인력관리공단) 등을 보유하고 있다.
[문광민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