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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과장에 맞선 ‘페넬로페 생존법’[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황태자의 사색
2022. 2. 1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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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과장에 맞선 ‘페넬로페 생존법’[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입력 2022-02-11 03:00업데이트 2022-02-11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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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모습의 오디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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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의 지혜는 돌아온 남편의 정체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장면은 긴 ‘오디세이아’의 클라이맥스다.
남편을 보고서도 그녀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초라한 몰골 탓이었을까? 페넬로페는 두 눈을 깜박이며 오디세우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다. “어머니, 무정한 어머니, 마음이 돌덩이 같으세요. 어째서 이렇듯 아버지를 멀리하시는 건가요?” 부부의 기이한 만남을 지켜보며 아들이 어머니를 나무랄 정도다. “온갖 역경을 견디고 이십 년 만에 고향 땅에 돌아온 남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이렇게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가진 여인은 달리 없을 거예요.”
의심하는 페넬로페
페넬로페의 반신반의는 오디세우스의 행색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번듯한 모습을 보인 뒤에도 그녀는 남편을 시험하면서 “둘만 알고 있는 증거”를 찾는다. 그녀의 무심함에 인내심 많은 오디세우스도 맥이 풀려 체념할 정도다. “자, 아주머니, 내게 침상을 펴주시오. 혼자서라도 잠들 수 있도록. 저 여인의 가슴에는 무쇠 같은 마음이 들어 있으니까요.” 무정한 여인도 물러서지 않는다. “에우뤼클레이아! 그이가 직접 만든 우리의 훌륭한 침실 밖으로 튼튼한 침상을 펴주세요.”너무하지 않나? 눈앞에 서 있는 남편의 존재를 믿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순간의 페넬로페는 증거를 찾아 진실을 밝히는 명탐정이자 철학자이다. 철학자들은 뻔한 것도 의심한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맞나? ‘1+1=2’가 맞나? 남편의 정체를 의심하는 페넬로페처럼 철학자들은 당연해 보이는 진리도 의심한다. 그런 의심에는 이유가 있다. 평면이 아닌 곡면 위에서도 삼각형은 내각의 합이 180도인가? 어떤 악령이 ‘1+1=2’라고 믿도록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속인다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철학자의 의심이 의심을 위한 의심은 아니다. 더 확실한 진리를 찾는 것이 의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변증술’이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모두 그런 의심과 질문의 기술이었다.
사악한 이득 노리는 세력
사악한 이득을 꾀하는 자들이 페넬로페의 주변에만 있었을까? 우리의 삶과 소신을 위협하는 거짓과 과장은 사기꾼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십 년 누적된 문제를 4, 5년의 임기 동안 해결할 수 있다는 정치가들의 큰소리도 과장이거나 거짓이다. 페넬로페의 집에서 4, 5일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떠난 나그네들의 흰소리와 다를 바 없는 ‘공약’(空約)이다. 수십 년간 키르케의 주문처럼 우리를 사로잡은 성장과 발전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이 나라에 왜 분노와 갈등은 점점 더 쌓여 가는가? 기술의 발달은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그와 함께 또 얼마나 많은 속임수가 생겨났나? 알고리즘 조작, 딥페이크, 심 스와핑…. 이름도 생소한 사기 수법들이 소비를 부추기는 과장 광고와 합쳐져 우리를 속인다. 그러니 우리의 시대를 일컬어 ‘탈진실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의심, 세상 바꾸는 첫걸음
이렇듯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의심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무엇이든 묻고 따지고 시험해 보자. 세상을 불신하고 타인을 믿지 못해 의심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의심은 더 큰 믿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페넬로페의 의심이 그랬고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그랬듯이. ‘오디세이아’ 이후 2800년이 지났어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의심 없이 내디딘 열 걸음보다 의심과 함께 내딛는 한 걸음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할 수 있다. 잘 의심하고 잘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거짓과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도 의심에서 시작한다.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