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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우아한 찐 계란에 담긴 애달픈 사랑의 욕망

황태자의 사색 2022. 2. 1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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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우아한 찐 계란에 담긴 애달픈 사랑의 욕망

[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용재 음식평론가
입력 2022.02.12 03:00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주인공 올리버가 반숙 계란을 먹는 모습. /프레네시 필름 컴퍼니

1983년 여름의 일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마을에 스물네 살의 대학원생 올리버(아미 해머)가 찾아온다. 방학 동안 고고학 전공 펄먼 교수(마이클 스털바그)의 연구 조교를 맡기로 했다. 펄먼 교수의 아들인 열일곱 살 엘리오(티모테 샬라메)는 올리버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거리낌 없고 타인의 눈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그가 내성적인 책벌레인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고학 답사에 동행하거나 시내에 자전거를 타고 함께 볼일을 보러 가는 등 시간을 같이 보내며 엘리오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자신의 감정을 털어 놓지만 올리버는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이러한 대화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도 결국 자신의 감정이 엘리오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곧 영화의 제목과 같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즉 나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관계가 된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자신의 이름인 엘리오로, 올리버는 엘리오를 올리버라 부르는 것이다.

전작 ‘아이 엠 러브 (2009)’와 마찬가지로 영상미만으로도 끝까지 시선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은 섬세한 소년이 불현듯 겪는 감정의 성장을 담은 영화이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영화 속 사랑에 애가 닳지만 다 보고 나면 신기하게도 계란의 기억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음식 평론가의 직업병인 것이다.

대체 어떤 계란이기에? 마을에 도착 후 저녁도 거르고 잔 올리버가 첫 아침 식사를 맞이한다. 너무나도 배가 고픈 나머지 냄비에서 반숙 계란을 하나 건져서는 급하게 먹으려다가 박살을 내버린다. 흰자는 부드럽고 노른자는 따뜻하지만 굳지는 않은 것을 컵에 받쳐 낸, 계란으로서는 최고의 격식을 차린 메뉴이다. 너무나도 게걸스레 먹자 펄먼 부인이 더 먹을 것을 권하지만 올리버는 ‘저 자신을 잘 아는데 두 개를 먹으면 세 개가 되고 그게 또 네 개가 돼서 여기에서 굴러 나가야 할 거예요’라고 답한다.

 

계란 노른자를 줄줄 흘리며 요란스레 먹어대는 한편 올리버의 계란과 말은 이후 벌어질 엘리오와의 관계나 거기에서 느끼는 욕망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단 한 개뿐’이라고 선을 그어 놓고 계란을 먹듯 엘리오와의 사이에서도 선을 그어 놓으려는 시도 말이다. 계란은 한 개만 먹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겠지만, 올리버는 엘리오를 향한 감정에 선을 긋는 데는 실패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계란은 우아한 것 치고 조리법이 매우 간단하다. 물을 냄비에 2.5cm 깊이로 담아 끓인다. 계란을 찜기에 담고 물이 끓기 시작하면 냄비에 올린 뒤 뚜껑을 덮는다. 찜기가 없다면 국자 등으로 계란을 한 개씩 냄비에 살며시 내려 놓는다. 6분 30초를 찌면 영화에서 먹는 것처럼 익는다. 다 익은 계란은 가볍게 껍데기를 두들겨 윗면을 잘라낸 뒤 먹는데, 맬든(Maldon) 처럼 아삭하게 씹히는 알갱이의 바닷소금을 조금 뿌리면 간이 맞는 한편 질감의 대조도 맛볼 수 있다. 좀 더 나아가 아스파라거스를 삶거나 데쳐 노른자를 찍어 먹어도 맛있다(토스트도 몇 쪽 곁들인다). 찐 계란을 받치는 그릇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어 ‘코크티에(coquetier)’이지만 인터넷에서는 ‘에그컵’으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서로를 향한 감정에 솔직해지는데 성공하지만 무심하게도 여름은 끝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눈치챈 펄먼 부부의 배려로 엘리오와 올리버는 근처 도시로 함께 여행을 떠나 사흘 간 함께 보낸 뒤 작별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겨울, 이탈리아에 돌아온 펄먼 가족에게 올리버가 전화를 건다. 그러고는 몇 년간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했던 여성과의 결혼 소식을 알린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가 자신의 이름으로 올리버를 부른다. 올리버. 올리버도 자신의 이름으로 엘리오를 부른다. 난 전부 기억해. 하누카(유대인의 명절)의 분위기로 들뜬 집에서, 엘리오는 혼자 벽난로의 불꽃을 바라보며 눈물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