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음악 평론의 가벼움
[밀레니얼 톡] 음악 평론의 가벼움
지난해 프랑스 작곡가 생상스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새 앨범을 냈다. 내 음반 가운데 세계적으로 발매한 사례이다 보니 여러 나라에서 나오는 리뷰를 읽는 재미가 있었다. 연주에 대한 소감을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내는 평론가의 날카로운 지적이 새로운 영감을 불러오기도 하고, 음악이 얼마나 다양한 해석을 불러올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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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가는 평가에 대한 압박을 항상 느끼는 직종이다. 시대를 거쳐 전해지는 텍스트(악보)를 연주한 수많은 레퍼런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악보의 정확한 실행뿐 아니라 논리와 지식, 그리고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해석력이 매 순간 중요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전음악가는 굉장한 양의 공부와 연습을 병행하면서도 항상 충분치 않다고 느끼며 완벽함을 추구한다.
이미 상당한 양의 압박감을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음악인은 그래서 타인의 평가에 취약하다. 언제나 큰 내면의 소용돌이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평가 내용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착하기도 한다.
내 앨범에 대한 평론들을 최근 읽었다. 하나는 독일의 저명한 잡지에서 낸 리뷰인데, 독일과는 인연이 거의 없는 나의 연주를 다뤘다는 사실 자체가 들뜨게 했다. 앨범을 진심으로 좋아한 듯한 평론가의 감정이 글에 담겨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나의 연주는 녹차, 생강, 비단에 비유되었고 심지어는 ‘동양인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닌가 보다’라는 차별적 발언을 내세우고 있었다. 칭찬으로 가득했지만 리뷰의 기저에는 ‘세상에, 동양인이라 손가락만 잘 돌릴 줄 알았는데 음악이 꽤 괜찮아!’라는 톤이 깔려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평가를 듣고, 나는 기뻐야 하나.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꽤나 으쓱해야 했나. 세상에, ‘진짜 서양’인 유럽에서 나를 인정하다니 나는 이제 ‘진짜’야. 이렇게?
반면 한국의 어떤 평론가는 나의 연주를 묘사하며 ‘종종 과한’ ‘거친 느낌의’ ‘유럽 정통파가 아닌’ 등의 표현을 썼다. 유럽 정통파 음악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평론가는 과연 알고 있을까. 고전 예술이 위대한 이유는, 시대의 검증을 통과해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의 사람과 오늘의 사람을 연결하는, 그러한 물음과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고전 문학이 그러하고, 고전 미술이 그러하다.
고전이란, 보수적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의 상징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심미안을 가진 시야의 사람만이 창조하는, 그리하여 시대를 초월하고 아름다움을 퍼뜨리는 가장 진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창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전을 잘 연주하는 것은 그러한 본질적 메시지를 최대한 효과적이고 현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나의 철학은 잘못된 것인가?
어디서는 너무 섬세하다고 하고, 어디서는 너무 과하다고 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평론을 읽다 보면, 어쩐지 좀 허탈해진다. 음 하나, 찍힌 점 하나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 의미를 체화하기 위해 무던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필사적인 몸짓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평가’는 너무 쉽게, 가볍게 쓰이기도 한다.
나는 평가와 전통에 지배당하지 않는 고전음악을 하고 싶다. 전통과 고전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음을 다잡아 본다. 촌스럽게, 우직하게 창조하는 음악을 하겠다고. 왜냐하면 그것이 고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