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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최후의 만찬’ 뒷모습…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황태자의 사색 2022. 2. 1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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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최후의 만찬’ 뒷모습…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대성당에서 하룻밤] ④시인 박준

박준 시인
입력 2022.02.15 21:00
 
 
 
 
 
 
 

공간은 빈 곳이므로 시간과 존재에게 너른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겨나는 현상을 통해 장소로 변모된다. 언제였는지,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였는지, 무엇을 생각했고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겼는지에 따라 하나의 공간은 숱한 장소로 분화된다. 어쩌면 인상적인 공간이란 얼마나 많은 장소를 만들어내었는가에 달려 있으리라.

그 밤 내내 대성당에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많은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들고 미사를 보기 위해 찾아들 곳이었지만 그 한낮의 대성당과 내가 머문 한밤의 대성당은 같은 공간이되, 다른 장소임이 분명했다.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대성당 제대 위에 이탈리아 조각 거장 줄리아노 반지가 그린 양면화 ‘최후의 만찬’(3.05x10.06m)이 걸려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 기본 골격을 가져왔으되, 만찬 속 13인의 뒷모습까지 그려낸 점이 독특하다. 그림 속에는 마리오 보타, 그리고 남양성모성지를 조성한 이상각 신부(예수 바로 옆 자리)도 그려져 있다. 반대편에 걸린 ‘수태고지’ 성화도 보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밤을 지나고 새벽을 건너 아침을 맞을 때까지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스마트폰 전파는 잘 잡히지 않았고 가방을 몇 번이나 뒤져보고 나서야 읽고자 했던 책을 집에 두고 왔음을 알게 됐다. 그러니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게 이 ‘할 일 없음’은 참 오랜만의 상황이었고 그리하여 낯설면서도 반가운 것이었다. 다만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의 ‘하릴없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입을 닫고 눈은 크게 뜬 채 생각나는 것만을 생각했다.

내가 찾은 대성당은 1886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경기도 화성의 남양성모성지에 위치해 있다. 리움 미술관의 설계자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79)의 작품. 60만 장의 적벽돌로 지어졌고 높이 솟은 두 개의 원통형 기둥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 두 개의 기둥은 건물 양쪽 지하에 묻은 터널과 함께 공기가 지나는 길이 되어 주는데, 덕분에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바닥 면적만 500평이 넘는 거대한 성당 내부, 천장의 숱한 창(窓)으로는 하늘이 쏟아져내릴 듯했고 그 아래 수없이 매달린 촘촘한 나무살로 인해 마치 현악기의 울림통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성당에서 가장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세로 3.5m 크기의 예수상과 그 양옆의 성화(聖畫)다. 모두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91)의 작품이다. 이곳 예수상은 우리가 알고 있던 원형(原型)을 훌쩍 넘어선다. 고개를 떨구지 않은 젊고 생명력 강한 모습의 예수. 눈을 또렷하게 뜨고 있는 까닭에 성당 어디에서든 마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재해석해 앞면과 뒷면을 모두 그려낸 성화도 파격과 새로움의 연장선에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전경.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50만장의 적벽돌로 이뤄진 대성당은 전면에 자리한 50m 높이의 반원형 타워만으로도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박준 시인은 새벽녘 이곳을 홀로 걸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하지만 온갖 사실적인 설명과 그럴 듯한 묘사를 동원해도 그 밤 내가 보고 느낀 대성당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을 떠올린 것도 이런 이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앞을 보지 못하는 지인에게 대성당을 설명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조금 어색하고 무료한 시간, 마침 TV 화면에서는 세계 곳곳의 대성당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문득 주인공은 이것을 온전히 설명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다. 하지만 유효하지 못한 말들이 이어지고 언어를 통해서는 대성당의 면모를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쯤 맹인은 주인공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고는 그 둘은 서로의 손을 포개어 대성당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눈을 꼭 감은 채 대성당의 그림을 그리던 주인공의 입에서는 이내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온다. 감각과 현실의 한계를 함께 넘어서는 순간이 이들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그 어떤 개인의 정원도 공원보다 넓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그 누구의 서재도 공공도서관보다 더 많은 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물론 이것들을 강제할 수는 없겠으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성당이나 교회나 사찰은 작으면 작은 대로 또 크면 큰 대로 좋을 것이다. 믿음의 공간은 애초부터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새로운 바람을 품을 때 우리는 어떤 공간을 나만의 장소로 만들어낸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공고한. 그곳을 위해 다시 눈을 감는다. /박준 시인

☞박준 시인은?

1983년생. 2012년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로 문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으며 주요 작가로 자리 잡았다. 이 시집은 2000년대 데뷔 작가가 낸 최초의 50쇄 시집이기도 하다. 산문으로도 보폭을 넓히며 영역을 확장 중인 시인은 현재 CBS 음악FM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 DJ도 맡고 있다.

 

☞남양성모성지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을 현양하는 성지(聖地)다. 스위스 출신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해 2020년 준공된 대성당은 기존 성당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구조로 유명하다. 특히 50m 높이 반원기둥 형태의 타워 두 동으로 쏟아지는 풍부한 빛의 기둥은 대성당을 일순 광휘로 채워넣는다. 보타의 부탁으로 이탈리아 조각 거장 줄리아노 반지가 제작한 예수상(像)과 두 점의 성화(聖畫) 역시 독특하다. 예수는 눈을 뜨고 있고, ‘수태고지’ ‘최후의 만찬’을 그린 성화는 앞·뒤 양면이다.

보타는 사실상 재료비만 받으며 10년 넘게 공사에 매달렸다. 믿음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바친 한국 신자들을 위한 이례적 결정이다. 보타는 “성지를 조성한 이상각 신부의 열정에 감명해 설계를 맡기로 결심했다”며 “성당 건축의 새로운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매일 오전(9시 30분~12시 30분) 미사가 열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