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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지옥도' 장르의 탄생

황태자의 사색 2022. 2. 1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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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지옥도' 장르의 탄생

중앙일보

입력 2022.02.16 00:33

지면보기지면 정보
양성희 기자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구독

'오징어 게임' '지옥'에 이어 넷플릭스에서 크게 흥행 중인 학원 좀비물 '지금 우리 학교는'. [사진 넷플릭스]

아무 데나 K를 붙이는 건 딱 질색이지만,  ‘K지옥도’ 장르의 탄생이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잇따라 선전 중인 우리 드라마 얘기다. K드라마 역사를 새로 쓴 ‘오징어 게임’을 필두로 ‘지옥’에 이어 이번에는 ‘지금 우리 학교는'(지우학)의 반응이 뜨겁다. 고등학교 배경의 좀비 영화로, 공개 즉시 전 세계 54개국에서 1위에 올라 보름간 정상을 지켰다. 한국 장르 드라마 특유의 강한 사회비판 메시지, 가족애 등 누선을 건드리는 감정 코드가 버무려졌다. 데스게임(‘오징어 게임’), 판타지 스릴러(‘지옥’), 좀비물(‘지우학’)까지 3연타가 터지면서 장르물에 대한 우리 드라마의 강세도 확인했다. 장르물 선호가 강한 북미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가디언은 ‘지금 우리 학교는’에 대해 ”한국은 이런 걸 잘 만든다. ‘부산행’을 본 사람이라면 좀비에 대해 한국이 세계 최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썼다.
 앞서 ‘K지옥도’란 표현을 써봤지만, 이 세 드라마의 공통점은 모두 지옥 같은 우리 현실을 비틀거나 담아냈다는 점이다. ‘오징어 게임’은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이 거액의 상금을 놓고 사투를 벌이는 얘기고, ‘지옥’에서는 가짜 믿음으로 세뇌당한 대중이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좀비 떼가 출몰하는 ‘지금 우리 학교는’의 학교는 이미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성적 만능, 빈부 갈등, 왕따와 폭력, 차별과 혐오가 난무한다. 디지털 촬영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학생은 좀비 떼를 보며 ”(학교는) 살아서도 지옥, 죽어서도 지옥“이라고 말한다. 이 학교 과학교사가 왕따 피해자인 아들을 위한 자구책으로 묘령의 약물을 개발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좀비물은 그 자체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현대사회의 공포를 은유하는 대표 장르로 꼽힌다. 친구와 가족이 하루아침에 괴물이 돼 나를 공격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그들을 때려잡아야 한다. 인간 자체가 재앙의 원인이다. 물리거나 접촉으로 감염이 확산되고, 오염된 ‘타자’들을 격리·배제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데, 몸 안에서 변이가 일어난다거나 겉으론 멀쩡한 ‘무증상 좀비’란 설정은 코로나19 상황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최근 읽은 우석훈 성결대 교수의 새 책 『슬기로운 좌파생활』이 내내 떠올랐다. ”불행한 한국인의 나이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고 있고,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라고 진단하는 책이다. 여기서 그는 특목고와 일반고 트랙이 나뉘는 중학교 2학년을 학업·취업이 연결되는 절망의 재생산 구조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지목했다. 이때 특목고 트랙에서 낙오한 남학생들이 남초 게임 커뮤니티에 모여 열패감을 여성 탓으로 돌리는 것이 ‘여혐’의 출발이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이생망’이란 단어를 처음 쓴 게 중학생이었듯, ‘중2병’은 그저 사춘기 열병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증상이란 결론이다.
 물론 그의 분석은 주로 젠더갈등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한국 사회의 지옥도가 이미 학교로까지 내려와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 앞서 빈부 갈등의 지옥도를 그린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의 높은 벽을 허물었고, 사회 비판은 한류 콘텐트의 강점이자 성공 요인으로 꼽혀 왔다. 그러나 지옥 같은 한국 사회가 창작자에게 끊임없는 이야기의 원천이 되고, K콘텐트의 기치를 드높이는 것과 별개로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지옥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지옥 같은 일일 터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아이들은 학교나 국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좀비 떼에 희생해 가며 탈출에 성공한다. 생존자가 된 아이들은 ”어른들은 우리를 버렸다. 어른들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아이들 중에서는 어른들 못잖게 악을 실행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과연 지금 진짜 우리 학교는 안녕한가.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