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끝나도 훈련 또 훈련...도핑·편파보다 선수들의 땀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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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TV 광고에 등장했을 때 차준환은 볼이 통통한 여섯 살 꼬마였다. 초등학생 땐 피겨스케이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큰 인기를 모았다. 열다섯 살 때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금메달을 두 개나 목에 걸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열일곱 살에 그는 극적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따내 남자 싱글 최연소 선수로 나서 15위를 했다.
4년 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차준환은 스물한 살 훤칠한 청년이 되어 다시 섰다. 쇼트프로그램 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더니 최종 5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여왕’ 김연아(32) 이후 한국 피겨의 올림픽 최고 성적이다. 숱한 부상을 겪고 코로나 사태로 해외 훈련도 막혔지만, 다 버텨내고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메달을 따낸 것이 아닌데도 차준환은 이번 올림픽에서 뜨거운 응원과 관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성장을 흐뭇하게 지켜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귀국하자마자 또 하루 종일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그를 지난 17일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트장 근처에서 만났다.
가장 하고 싶은 건 ‘연습’
- 올림픽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훈련인가요.
“경기 끝나고 이틀 만에 베이징에서도 훈련했어요. 귀국해서 격리 풀리자마자 집과 링크만 오가며 훈련했고요. 다음 달에 세계선수권 대회가 있어요. 늘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본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선물이죠.”
- 지독한 연습 덕분인지 쇼트프로그램 연기가 완벽했어요.
“올림픽까지 스스로 잘 이끌어왔다는 생각에 정말 재미있게 탔어요. 평창 올림픽 경험이 굉장한 도움이 됐죠. 그땐 스케이트 문제도 있었고 부상도 심했어요. 그런 경험이 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이번엔 올림픽에 맞춰 컨디션을 차근차근 끌어올렸고,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를 찾았어요.
이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을 순간순간 세세하게 느끼면서 기억에 남기고 싶었어요. 올림픽만이 줄 수 있는 긴장감까지도 제대로 즐기려고 했어요.”
- 쇼트프로그램 순위를 보니 메달이 기대되지 않던가요.
“제가 준비한 것들을 보여드리고 깨끗한 경기를 하는 게 목표였어요.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톱텐이 목표였는데 그 이상을 했죠. 경기 전날 잠은 잘 못 잤지만 ‘어휴, 내가 잠 못 잤어’ 이렇게 생각하면 뭐 할 거예요. 다른 대회 때도 잘 못 자는 건 마찬가지니까 이것도 저만의 루틴 중 하나라고 여겼죠.
당연히 부담감 느꼈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했어요. 위축되는 대신 ‘내가 이래서 부담을 느끼고 있구나. 그러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해야 원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거죠. 빙판에 들어설 땐 ‘하나씩 하나씩’이란 말을 마음에 새겼어요. 4분이란 시간이 짧지만 구성 내용을 보면 길어요. 하나씩 하나씩 펼쳐가자고 생각하면 부담감이 줄어들어요.”
빙판 들어설 땐 ‘하나씩 하나씩’
베이징 올림픽 기자회견 때도 그는 ‘한국 가서 가장 하고 싶은 일’로 연습을 꼽았다. 프리스케이팅 경기 도중 첫 번째 4회전 점프인 쿼드러플 토룹을 뛰다가 크게 넘어졌는데, 이걸 완벽하게 연습하고 싶다고 했다.
넘어진 뒤에 그는 벌떡 일어나 곧바로 이어진 4회전 점프 쿼드러플 살코를 비롯해 남은 과제들을 모두 깔끔하게 마쳤다. 금메달을 딴 미국의 네이선 첸(23)이 최근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극찬했다. “차준환이 크게 넘어진 다음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쿼드러플 살코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았다. 나도 비슷한 상황이 많았는데 그럴 때 포기하고 낙담하기도 했다. 차준환은 훌륭한 기본기와 기술을 갖췄고 미래가 밝은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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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어지고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프리스케이팅 경기 앞두고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어요. 재미있게 준비했는데 첫 번째 점프에서 예상보다 큰 실수가 나왔어요. 연습 때도 그렇게까지 크게 넘어지지는 않으니 놀라기는 했죠. 사실은 좀 화도 났어요. 저의 실수죠.”
-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 뒤에 이어진 연기를 끝까지 잘해냈어요.
“실수는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프로그램 전체로 봤을 때 하나의 작은 부분 때문에 다른 부분들을 놓칠 수는 없었어요. 그런 굴곡은 사실 언제든 있었으니까요.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음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면서 더욱 집중했어요.”
- 평창 올림픽 때처럼 이번에도 많은 걸 얻었나요.
“두 번의 올림픽을 치르면서 제가 피겨를 왜 좋아하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깨달았어요. 특히 이번 기회를 통해 앞으로 발전해나갈 방향을 잡을 수 있었어요. 올 시즌을 앞두고 고난도 기술에 더 많이 도전할지, 내가 정말 잘하는 것들로 좋은 조화를 이룰지 많이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어요. 이제부터는 음악적 요소와 함께 구성에 더욱 신경 쓰면서 차츰차츰 기술을 업그레이드해나갈 생각이에요.
현재 4회전 점프들의 성공률을 높인 다음에 새로운 4회전 점프까지 넣는 것이 목표예요. 저는 지금까지 조금씩 천천히 성장하면서 계속 걸어 올라왔어요.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정말 높은 곳을 바라보는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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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없이 혼자서 더 열심히 훈련
- 주니어 시절부터 한국 남자 피겨의 독보적 스타로 기대를 많이 받았어요.
“저에 대한 기대가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피겨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선수끼리 경쟁하죠. 하지만 경기하는 시간 동안은 빙판 위에 혼자 있어요. 어떻게 보면 자신과의 싸움이에요. 부담이 있다면 저 자신에 대한 것이고, 훈련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그래도 10대 시절을 5년 넘게 외국에서 훈련만 하며 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캐나다에서 지낸 5~6년 동안 정말 스케이트 말고는 한 게 없어요. 똑같은 일상을 계속 반복하면서 살았죠. 저는 10대가 굉장히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겠어요. 조금 아쉽기도 해요. 그래서 경기나 특별한 기회를 순간순간 세세하게 기억에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커요.”
- 코로나 확산 사태 탓에 한국에서 코치 없이 거의 2년간 자율학습을 한 셈인데, 불안하지 않았나요.
“국내 훈련하는 동안 병원도 자주 다니고 운동도 많이 해서 컨디션 관리에 도움이 됐어요. 무엇보다 저의 연습량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브라이언 오서(61·캐나다) 코치와 함께 오래 훈련해온 것을 바탕으로 혼자서 아침부터 밤까지 전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 오랜만에 한국에서 긴 시간 지내면서 국내 훈련 환경에 대해 아쉬웠던 점이 있나요.
“사실 한국에는 아직 피겨 선수들만을 위한 아이스링크가 없어요. 지난 2년간 코로나 사태로 링크 곳곳이 문을 닫아 저도 전국 여기저기 다녔어요. 선수들이 좀더 부상 걱정 없이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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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응원 갔다 매력에 빠져
- 경기 이외에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요.
“쇼트트랙 대표팀 응원을 갔어요. 최민정(24) 선수가 은메달 딴 여자 1000m 결승, 남자 선수들 5000m 계주 준결승까지 봤어요. 평창 올림픽 때도 응원을 가서 쇼트트랙이라는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어요. 너무 멋있고 레이스 하나하나에 감동이 담겨 있더라고요.
선수촌 생활은 다른 대회 때 호텔에서 지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원래 올림픽 선수촌에는 선수들을 위한 즐길거리가 많은데 코로나 때문에 그런 것들이 없어 아쉬웠죠. 음식은 주로 한식 도시락과 어머니가 준비해주신 장조림을 먹었어요.”
- 이번 올림픽 내내 도핑, 편파 판정 등 각종 논란과 스캔들이 크게 부각됐어요. 선수로서는 아쉬운 점이 있겠죠.
“판정 이슈가 있었지만, 우리 선수들이 정말 멋지게 이겨냈죠. 피겨 여자 싱글에서도 도핑 이야기가 나오지만, 또 우리 선수들이 정말 멋있게 자기 경기를 잘해냈죠. 그런 게 정말 중요한 것 아닐까요. 선수들은 4년 동안 모든 노력을 쏟아 열심히 올림픽을 준비해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서 더욱 빛났던 우리 선수들 모습을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 이번 올림픽 자신에게 몇 점 주고 싶나요.
“100점 만점에 98점요. 제가 원했던 대로 세세하게 순간순간을 잘 기억하면서 올림픽을 온전히, 무척 재미있게 즐겼어요. 실수를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경기에 후회 없을 만큼 모든 걸 쏟아냈고요.”
- 그럼 2점은 왜 깎았나요.
“(웃으며) 실수 때문이에요.”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차준환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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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환
2001년생으로 TV CF·드라마 등에 출연한 아역 배우였다. 연기에 도움 될까 싶어 초등학교 2학년 때 스케이트를 시작했고, 한국 남자 피겨스케이팅을 대표하는 스타 선수로 성장했다. 전국종합선수권 6연패, 2016년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2회 우승, 2018년 그랑프리 파이널 동메달, 지난달 4대륙선수권 금메달을 차지했다.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프로그램·프리스케이팅·총점 모두 개인 최고점을 새로 쓰며 5위에 올랐다. 빼어난 외모로 ‘K팝이 놓친 태릉 인재’라는 말을 듣는다. 중국·일본에도 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