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나무에 내린 노을, 정글서 마주친 탱크, 연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아름다운 순간은 짧았다”
불꽃나무에 내린 노을, 정글서 마주친 탱크, 연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아름다운 순간은 짧았다”
[아무튼, 주말] ‘트래블 버블’로 격리 없이
산호초의 섬 사이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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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의 겨울이 여름으로 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4시간 반. 사이판 공항을 벗어나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릴 때 양옆으로 핀 꽃들에 시선이 닿았다. 다섯 개 꽃잎이 반쪽으로 나 있어 두 송이를 겹쳐야 완전해진다는 ‘하프 플라워(half-flower)’였다. 사이판이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만 하는 바다 휴양지라는 건 ‘반쪽짜리’ 생각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걷고 또 걸었던 길들, 숲에 잠긴 전쟁의 흔적들, 원주민 차모로족의 일상까지. 사이판의 또 다른 반쪽은 바다 바깥에 있었다.
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코로나 확진자는 곱절로 늘었다. 비행기는 뜰까, 여행객이 있을까 우려했지만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 했다. 코로나가 3년째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내 여행객들이 격리 없이 갈 수 있는 해외는 싱가포르를 제외하고 사이판이 유일하다. 북마리아나 제도 연방 정부가 작년 7월 한국과 단독으로 트래블 버블을 체결한 덕분이다. 2월 한 달 동안 사이판을 찾은 한국 관광객은 2700명, 누적 관광객은 1만명 이상이다. 6박 8일, 인구 5만 작은 섬 사이판을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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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섬 로드’를 구르는 코코넛처럼
공항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켄싱턴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남쪽으로 이어진 ‘비치로드’ 산책에 나섰다. 1시간 20분 걷는 동안 운 좋게도 노을을 만났다. 길 왼편에 사이판을 상징하는 붉은 불꽃나무(flame tree)가 수십 그루 줄지어 서있고, 오른편엔 석양을 담은 주홍빛 파도가 밀려왔다. 맞은편에서 조깅하던 중년의 차모로족 여성이 멈춰서더니 “여행객이냐”고 물었다. “아름다운 시간은 짧아. 너의 여행이 순식간이기를!” 그녀가 추천한 경로는 ‘마이크로 비치’에서 출발해 ‘킬릴리 비치’에 닿는 구간. 나무 덱과 흰 모래를 번갈아 밟을 수 있는 6.5㎞ 정도의 거리다.
벤치에 앉아 지도 앱을 켰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섬을 종단하는 데는 차로 30분. 전체 면적은 서울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지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이 보였다. 주택가를 지나자 수리 중인 집들과 주거용 텐트가 보였다. 최대 번화가라는 ‘가라판’에도 문 닫은 식당과 쇼핑몰이 눈에 띄었다. 2018년 태풍 ‘위투’로 큰 피해를 본 데다, 이듬해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섬을 덮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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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에도 걸었다. 해풍이 반가울 정도로 산뜻하게 걷고 싶다고 하자, 현지 가이드는 사이판 북부의 ‘버드아일랜드(새 섬) 전망대’에서 ‘일본군 최후사령부’까지 이어지는 길을 추천했다. 이른바 ‘새 섬 로드’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아스팔트 도로 옆 잔딧길이 4.5㎞가량 이어진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하늘과 나무뿐. 간혹 땅에 떨어진 코코넛 열매에도 눈길이 갔다. 사람 발에 치여 데굴데굴 방황하는 사춘기 녀석이 있는가 하면, 갈라진 섬유질 틈에서 벌써 싹이 자라 뿌리를 내린 어엿한 청년도 있다. 코코넛을 보고 엉뚱하게 인생사를 떠올린 건 코코넛 열매에 난 눈과 입 모양 때문이었을까. 코코넛 이름도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얼굴’이란 뜻의 ‘coco’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니 우연은 아닐 테다.
새 섬 전망대에서 일본군 최후사령부까지는 걸어서 1시간15분이 걸렸다. 최후사령부는 일본군이 마지막까지 연합군에 저항하던 요새다. 천연 동굴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바깥에는 포탄에 맞은 흔적이 보였고, 당시 쓰이던 대포와 전차가 놓여있었다. 요새 주변은 그늘지고 바람이 서늘해 현재는 원주민들의 피크닉 장소로 이용되는 듯했다. 한국인 위령탑도 나란히 서 있었다. 억울하게 징용돼 목숨을 잃은 한국인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1981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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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절벽과 정글 속 탱크들
사이판은 태평양 전쟁 최대 격전지였다. 그 흔적들이 섬 북부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여행 3일 차에 가본 만세절벽이 대표적이다. 1944년 7월 연합군이 사이판을 공격해오자 일본군과 민간인들은 절벽 아래서 뛰어내리기를 택했다. 이들이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해서 만세절벽이다. 절벽 아래로는 수심 1만2000m 마리아나 해구가 자리하고 있다. 만세절벽에서 뒤를 돌아보면 자살절벽 바위가 있다. 연합군에 항복하지 않은 일본군이 뛰어내려 죽은 곳이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참상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절벽 끝에 선 아이가 무섭다고 울면 어머니가 자식을 밀치고, 뛰어내리기 주저하는 아버지는 일본군 병사가 사살하는 광경도 연합군에 포착됐다. 그중에는 조선인 출신도 뒤섞여 1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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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나도 앙금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만세절벽에는 일본 정부가 세운 ‘충혼비’가 있다. 비석 아래를 보니 덕지덕지 뭔가가 검게 붙어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이곳 사연을 들은 한국·중국 관광객들이 껌을 붙여 놓은 것이라고 했다.
“정글도 갈 수 있겠어요?” 만세절벽을 둘러본 뒤 가이드가 물었다. 정글은 만세절벽 충혼비에서 50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길이 나 있는 풀숲이었다. 원주민들 등산 코스인데, 경사는 완만하지만 길이 좁은 왕복 1시간 코스다. 수풀이 빠르게 자라 길이 없어질 수도 있어서 반드시 전문 가이드와 동행해야 한다.
정글 내부는 가는 가지들이 뒤엉켜 아치형 동굴을 이루고 있었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는 바다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전쟁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연합군 철제 탱크가 붉게 산화한 채 버려진 모습이 한 폭의 우울한 유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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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세일링, 몸이 연처럼 휘날렸다
두 번째 숙소는 ‘월드 리조트’였다. 가라판 시내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대규모 워터파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띠를 두른 듯 경계가 확연했다. 관광객 안전을 위해 정부가 인공 둑을 쌓은 줄 알았더니, 아니다. 천연 산호초가 섬을 제방처럼 둘러싼 것이었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데 뛰어들지 않을 사람 없다. 스마일링 코브 마리나 항구에서 2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면 ‘마나가하섬’이 나온다. 비용은 환경세를 포함해 50달러. 스노클링을 하면 눈 시릴 정도로 화려한 열대어를 볼 수 있다. 바다 위 하늘을 활주하는 패러세일링도 도전했다. 비용은 50달러. 보트가 빠르게 달리며 선체에 매달린 낙하산을 공중으로 띄웠다. 마치 연을 날리는 듯했다. 낙하산에 매달린 몸이 해면에서 멀어지니 마나가하섬이 한눈에 보였다. “스톱!”을 외쳐도 정해진 높이까지 오르기 전까지는 내려올 수 없다. 그저 한 장의 연처럼 휘날리며 공중에 눈물을 흩뿌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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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토에서는 깊은 수심에서 다이빙을 할 수 있다. 가라판에서 차량으로 30분 거리에 있다. 이곳은 파도가 깎은 자연 동굴 아래 20m 수심 바다다. 수심이 깊어 5분간의 다이빙 교육을 들어야만 체험 가능하다. 전문 가이드들이 수중에 비치는 햇빛을 배경으로 수중 촬영을 해주기도 한다. 교육부터 촬영까지 ‘사이판 어드벤처’를 통해 가능하며, 총 비용은 50달러다.
◇해안 절벽으로 티샷을 넘길 수 있다고?
종일 즐긴 물놀이에 다리가 후들거린다면 높은 칼로리의 음식이 제격이다. 원주민들이 즐겨 찾는 식당 ‘웨스트코스트 레스토랑’으로 갔다. 가라판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해변 식당답게 바다 너머로 지는 석양이 일품이다. 추천 메뉴는 시푸드 링귀네 페스토(14.5달러)와 오리지널 립아이 스테이크(28.5달러). 시내에서 차로 12분 거리에 있는 ‘허먼스 모던 베이커리’도 유명하다. 사이판에서 가장 오래된 베이커리로 1944년에 문 열어 올해로 78년째다. 컵케이크와 도넛, 머핀(1.75달러부터)뿐 아니라 수프와 밥을 포함한 스페셜 식사 메뉴(7.5달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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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절벽을 낀 골프 코스는 사이판에서 처음 봤다. 코럴 오션 포인트 리조트 클럽은 줄여서 COP라 불리는데, 7·14번 코스에서 바다 너머로 티샷을 날릴 수 있었다. 라오라오 베이 골프&리조트는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유일하게 36홀을 갖춘 최대 규모 골프장이다. 6·7번 홀에서 해안 절벽 사이 바다 너머로 샷을 넘길 수 있고, 라오라오 만 주변을 걷는 트레킹 코스도 있다.
사이판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 현지 가이드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저 아름다운 여행이었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이 없을까 고민하다 한마디를 꺼냈다. “순식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