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푸틴이 우크라이나 구원한다고? 가상의 적 ‘나치’ 끌어들여 주권 침탈했다”
[아무튼, 주말] “푸틴이 우크라이나 구원한다고? 가상의 적 ‘나치’ 끌어들여 주권 침탈했다”
반러·반전 시위의 중심에 선
우크라이나인 올레나 쉐겔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침공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후 동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전면전은 처음 있는 일이다. 21세기에 벌어진 이 전쟁은 두 국가의 ‘정체성 전쟁’으로도 볼 수 있다. 러시아 군대에 맞서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인 내면에는 어떤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을까.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주한러시아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 한가운데서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올레나 쉐겔(41) 교수. 그는 현재 한국외국어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로 재직하며 우크라이나 언어와 역사, 정치를 강의한다. 국내 모든 반전 시위와 러시아 규탄 움직임의 중심에 있는 그를 지난 1일 만났다.

-러시아를 규탄하는 첫 시위를 주도했다.
“‘주도’라는 말은 부끄럽다. 시위에 동참한 다른 우크라이나인은 동대문 시장에 가서 노란색, 파란색 천을 구입해 재봉틀로 국기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쉽게 구할 수 없어서다. 피켓도 다함께 만들었다. 제발 우크라이나를 도와 달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족 걱정이 크겠다.
“육촌 여동생 한나(27)가 지하 벙커에서 어제(지난달 28일) 출산했다. 남편과 이란에 있다가 출산을 위해 어머니가 있는 우크라이나로 왔는데, 하필 그때 전쟁이 벌어졌다. 출산 예정일은 러시아가 침공한 24일이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어머니가 “아무래도 전쟁 세상에 나오기 싫은가봐”라며 우셨다. 나의 부모님과 여동생은 수도 키이우(키예프)로부터 300㎞ 떨어진 곳에 있다. 서너 시간 간격으로 통화하는데, 그저께 12시간 동안 연락이 안 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러시아 침공의 서막은 2014년 크림반도 합병부터다.
“우리는 ‘합병’이란 말 대신 ‘임시 침공된 우크라이나 영토’라고 한다. 크림반도는 1954년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편입됐다. 두 국가 모두 소련이었으므로 당시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2014년 3월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가 이뤄졌다. 표를 행사하지 못하게 막거나 조작하는 일이 만연했지만 결국 러시아로 넘어갔다. 시기적으로도 푸틴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대규모 반정부 유혈 시위가 일어나 대통령이 도주해버린 정치적 불안 상황이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시도가 러시아를 자극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었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는 물론 서방국가에도 기대지 않는 중립 입장이었다. 나토 가입 추구를 헌법에 담은 건 2019년 2월 들어서다. 러시아가 크림을 빼앗고 우리 영토에서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킨 2014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시점이다. 러시아가 침공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나토에 가입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푸틴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9세기 키이우 루시 공국에서 뻗어 나온 한 민족이며, 현재는 ‘나치’를 계승한 정부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했다’고 주장한다.
“한 뿌리라 부르기에는 민족, 종교, 문화 측면에서 차이점이 많다. 키이우 루시 공국은 수많은 공국으로 이뤄진 연방 국가라 당연히 슬라브족 외 여러 부족이 섞여 있다. 종교도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푸틴이 말하는 ‘나치’ 또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푸틴을 비롯한 일부 러시아인에게는 옛 소련처럼 다시 단결할 수 있는 일종의 ‘신화’가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나치와 혈투를 벌였던 2차 세계 대전이다. 이때의 빛나는 영광을 되찾으려 가상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인도 자신이 러시아인과 다르다고 생각하나.
“나 또한 소련을 겪은 세대이지만, 나와 내 주변인 모두의 정체성은 유럽인이다. 우리 앞에 칼을 내밀어도 빼앗을 수 없는 건 ‘자유’다. ‘자유를 위해 영혼과 몸을 희생하겠다’는 가사가 애국가에도 있다. 2004년 ‘오렌지 혁명’, 2014년 EU와의 경제협정 무산에 반발한 ‘유로마이단’ 시위까지. 잘못된 게 있으면 대통령도 끌어내린다. 하지만 러시아를 보라. 대통령이 22년째 장기 집권 하는데도 역사에 기록될 만한 시위는 없다. 그만큼 서로 쉽게 섞이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서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이라 치자. 하지만 마음 올바른 초보가 마음이 잘못된 경력자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선 후 부정부패를 완벽히 근절하지 못해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에는 해외로 도피하지 않고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며 다시 지지율이 올랐다. 소셜미디어에는 ‘나는 널 안 찍었지만, 지금은 생각 바뀌었다’ ‘끝까지 우리 곁을 지켜 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