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가장 맛있는 커피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커피”··· 그의 찻잔엔 봄빛이 넘실거렸다
[아무튼, 주말] “가장 맛있는 커피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커피”··· 그의 찻잔엔 봄빛이 넘실거렸다
커피 명인 박이추와 함께
봄 찾아 떠난 강릉 여행
여과지 안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갈색 거품이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이러기를 서너번. 추출물을 받아내는 드립 서버엔 진갈색 용액만 남았다. 베토벤이 ‘60가지 좋은 아이디어로 안내한다’고 했던 60알의 원두, 그것에서 추출한 영감(靈感)의 용액, 커피다.
바(bar)에서 안경 위로 눈을 치켜뜨며 노련하게 커피 용액을 추출하는 72세 커피 장인은 마치 실험실의 과학자 같았다. 말없이 커피잔에 용액을 담아 직원에게 건네곤 로스팅실로 다시 사라지는 이는 바리스타 박이추(朴利秋)씨. 우리나라 1세대 바리스타인 ‘1서3박(서정달·박원준·박상홍·박이추)’ 중 유일하게 현업에서 활동하고 있다.
봄기운 완연했던 지난주 강원도 강릉 연곡면으로 갔다. 커피 장인 박이추가 직접 내려주는 핸드 드립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카페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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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내리는 ‘1세대 바리스타’
보헤미안박이추커피 본점엔 진한 커피향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신의 커피’라 불리는 ‘파나마 게이샤’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커피 (주문) 있습니다”라고 외치자 로스팅실에 앉아있던 박이추 대표가 나와 묵묵히 커피를 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금속 주전자는 식을 겨를도 없이 뜨거운 물이 채워졌다. 때로 주전자를 탁탁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를 추출하는 비법인가 물었더니 “30여 년 넘게 무거운 주전자를 들다 보니 손목에 무리가 가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럼에도 직원들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서 하루에 최소 80잔, 많게는 150여 잔을 직접 내리는 이유는 “(커피에) 미쳐서!” 책장에 꽂혀 있던 일본책 ‘LIFE SHIFT’를 꺼내든 그는 “여기 보면 ‘행복한 사람의 유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며 빙그레 웃었다. “월급이 올라가면 행복을 느끼는 사람, 물질을 얻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 등이 있는데 저는 그중 마지막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아요. 커피를 내릴 때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직접 커피를 내릴 뿐입니다.”
잠시 뒤 그가 내어준 커피는 한잔의 ‘차(茶)’ 같았다. 묵직하고 깊은 맛 뒤엔 갓 딴 열매를 우려낸 듯 상큼하고 깔끔한 맛이 났다. ‘산미(酸味·신맛)’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맛이었다. 강릉엔 전망이나 시설 좋은 카페가 즐비하지만, 커피 애호가들이 연곡면 홍질목길 마을의 외진 이곳까지 일부러 찾는 이유가 180㏄ 커피 한잔으로 설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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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째 강릉 살이
“올해로 22년째,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사는 도시가 어쩌다 강릉이 되었네요.”
박이추가 처음부터 커피 그리고 강릉과 인연이 깊었던 건 아니다. 일본 규수 오이타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박이추는 서울대 공과대에 다니던 형의 영향을 받아 1974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왔다. 처음 정착한 곳은 경기도 포천. 공동체 농장 형태인 ‘협동 농장’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스물네 살에 아버지 지원을 받아 직접 목장을 운영했지만, 그가 꿈꿨던 협동 농장은 한국 실정과 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이후 경기도 광주를 거쳐 문막까지, 정착보다는 방황한 시간이 더 많았다. 커피를 배우게 된 건 지금의 아내를 만나 ‘먹고살 궁리’를 하면서부터다. “가정을 지키려면 안정된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1986년쯤 누이가 사는 도쿄로 가 주경야독하며 커피를 배웠어요. 생활비를 벌어야 해 낮에는 공사판을 오가는 트럭을 끌고, 밤에는 중앙커피주식회사와 깃사텐학원에서 커피 공부를 했죠.” 운 좋게 일본커피연구소의 가라사와 소장을 만나면서 개인지도까지 받았던 그는 1년 반 만에 ‘커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88년 혜화동에 ‘가배 보헤미안’을 열었다. 이후 안암동으로 옮겨 10여 년간 서울의 대표 핸드 드립 커피 전문점으로 자리 잡았다. 그 사이 귀화도 했다.
명성이 자자해지자 돈벌이를 목적으로 커피를 가르쳐달라는 이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회의를 느낀 2000년, 그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강릉으로 왔다. 그 무렵 단국대 사회교육원에 커피전문가 과정이 처음 개설되며 그곳의 첫번째 교수로 초빙됐다. 소금강 부근 진고개, 경포대를 거쳐 지금 있는 연곡까지 그는 “연어처럼” 동해에 자리 잡았다 했지만,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의 정착은 강릉의 커피 계보와 풍경을 바꿔놓았다. 그의 커피를 맛보기 위해 강릉을 찾는 이들이 늘었고, 해변엔 차츰 핸드 드립 커피, 스페셜티 커피 등을 내세우는 카페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현재 강릉엔 카페나 카페 형태로 영업 중인 곳이 400~500여 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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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문 열어 곧 20여 년이 되어간다는 ‘박이추 건물’은 지나치기 쉬운 위치에 있다. 아담한 건물의 1층은 자택으로 쓰고, 3층이 카페다. 무작정 찾아간다고 그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휴무,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오후 5시에 한해 박이추가 직접 볶은 원두로 내려주는 커피를 맛볼 수 있다. 문 여는 나흘 동안은 바리스타를 꿈꾸는 젊은 청년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까지 끊임없이 발걸음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내려주는 커피는 한번이면(한번만 맛보면) 족하다”고 했다. 맛있는 커피에 대한 철학도 남다르다. “맛있는 커피는 ‘팔자와 운명을 바꾸는 커피’라고 생각해요. 커피 한잔의 여유로 인생의 전환점을 찾고, 인간적인 발전을 이루고, 삶이 달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맛있는 커피인 거죠.” 커피를 내려주는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커피라면 더 없이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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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호 호수 ‘산보’, 소돌 해변서 커피
시곗바늘이 정확히 오후 5시를 가리키면 그도 카페를 벗어난다. 차를 타고 간 곳은 북쪽 주문진 향호 해변. 부지런히 그의 걸음을 따라가니 향호 호수가 나왔다. 강릉 경포대, 고성 송지호와 함께 강원도 동해 대표적인 석호(潟湖·사주, 사취 등으로 갈라져 바다로부터 분리된 호수) 중 하나로 꼽히는 향호 호수는 강릉 시민 박이추가 즐겨 찾는 ‘산보’ 코스다. “총 2.5㎞로 30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어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 “강릉 하면 경포대부터 떠올리지만, 주문진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 ‘향호’로 와요. 한적하고 조용해서 사색하며 걷기 좋습니다.” 호수 입구에서 곧바로 직진해 걸으면 체력 단련 시설들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나무 숲 사이로 호젓한 탐방로가 이어진다. “봄·가을이 특히 아름답지만, 맑은 날엔 노을 풍경이 근사해요. 대관령을 물들이는 노을과 노을을 받아내는 호수를 곁에 두고 걷다 보면 어느새 한 바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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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호 호수로 진입하는 길 역시 주말이면 번잡해진다. 호수 때문이 아니라 방탄소년단(BTS)의 ‘봄날’ 앨범 재킷 촬영지였던 BTS 버스 정류장 때문이다. 앨범에 배경이 된 버스 정류장 구조물은 철거됐지만, 강릉시가 포토존을 재현해놓아 ‘방탄 투어’ 코스로 인기다.
산책 마무리는 주문진 해변 남쪽 소돌 해변의 카페 가디스(GODDESS)에서 한다. “커피 장인은 다른 사람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땐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외관만 보면 언뜻 해안도로변에 있는 흔한 카페인데, 박이추는 “이곳 주인 부부를 보면 과거의 우리 부부가 생각난다”고 했다. 카페라테 한잔에 3400원, 대부분의 커피와 음료가 5000원을 넘지 않는다. 야외 테라스 좌석에 앉으면 왕복 2차로를 사이에 두고 탁 트인 소돌 해변과 마주한다. 그냥 지나친다면 아쉬울지 모른다. 해변 한쪽에 있는 소돌아들바위공원은 바다를 무대로 한 거대한 바위 조각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약 1억5000만 년 전 바다 아래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솟아올랐다고 알려진 바위들은 보는 방향에 따라 소를 닮은 소바위(소돌)부터, 코끼리와 거북 등을 연상케 한다. 그중 구멍 송송 뚫린 아들바위는 ‘자식이 없던 노부부가 간절한 기도로 아들을 얻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아들바위공원 가까이 해안초소 쪽 탐방로에 오르면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탐방로 남쪽 끄트머리로 가면 어민들이 잡은 해산물을 판매하는 소박한 소돌항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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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거리 지나 ‘솔바람 다리’까지 드라이브
소돌 해변에서 남쪽으로 5분 정도 가면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한 연곡면 영진해변과 만난다. 촬영지였던 방사제뿐 아니라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몇 년새 해안도로변으로 카페, 식당 등이 촘촘히 들어섰다. 주문진 도깨비 시장은 오징어 가미 공장이 있던 곳을 되살린 복합문화공간. ‘복사꽃싸롱’ 등 테마 카페, 도깨비 시장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루프 톱’과 주문진 바다가 내다보이는 ‘담소당’ 등을 뒤로 하고 지하 1층 ‘도깨비미술관’의 문을 열면 엉뚱한 풍경이 펼쳐진다. 와인과 강릉 맥주 등을 판매하는 주류판매점 ‘엉클주’와 패브릭을 전문으로 하는 리빙디자인 브랜드 ‘네스홈’, 주얼리공방 ‘아스타주얼리’ 등이 자리해 있다. 미술관이라는 이름은 미(美)를 담당하는 공방과 ‘술’을 판매하는 주류판매점이 있다는 뜻. 내부엔 오징어 가미 공장의 흔적인 낡은 배전반과 기계들이 박물관 전시품처럼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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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추는 “강릉의 옛 정취가 느껴지는 주문진. 대관령옛길, 진고개 등을 좋아하지만, 가끔 차를 타고 강문 해변에서 시작해 안목 해변과 강릉항 앞까지 드라이브 가기도 한다”고 했다. 안목해변과 남항진해변 사이엔 솔바람 다리가 있다. 솔바람 다리는 강릉항 일대와 남대천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이자 남대천 너머 떨어지는 일몰 감상 포인트다. 주차 후 솔바람 다리를 건너 두 해변을 오가는 코스도 괜찮다. 인근 초당동에 작년 말 개관한 미디어 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 강릉도 지나치긴 아쉬울 터. 동해안의 파도와 소나무, 풍력발전기 돌아가는 강릉 고원지대 풍경이 미디어 아트 등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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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추는 “앞으로 3년 정도 강릉에 더 머무른 뒤 경북 울진의 조용한 바닷가에서 인생의 마지막 커피를 할 것 같다”고 했다. 강릉은 자신의 커피 인생에서 종착지가 아닌 ‘경유지’라는 것. 울진으로 가는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안주하지 않고 커피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서요. 세상엔 유행을 따르며 발전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발전하는 사람도 있죠.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서 발전하려면 끊임없이 배워야 해요. 제가 하고 싶은 ‘남은 공부’가 그곳에 있다고 믿어요.”
[ ‘못생김 주의 생선’ 장치, 살은 부드러워 살살 녹네 ]
강릉 ‘소확행’ 맛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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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엔 작지만 확실한 식도락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 맛집들이 속속 숨어 있다. 커피 장인 박이추가 추천한 별미는 주문진 수산시장 부근 월성식당 본점의 매콤한 장치찜(소 2만2000원). 동해에서 주로 먹는 장치의 본명은 ‘벌레 문치’. ‘못생긴 생선’이라는 불명예가 있지만, 살이 두부처럼 부드럽다. 큼지막한 감자를 곁들인 매콤 칼칼한 양념에 밥을 비벼 먹으면 밥 도둑이 따로 없다.
‘소돌 해변’ 주변에선 ‘달인 막국수’로 불리는 소돌막국수가 유명하다. 직접 반죽한 생면을 사용한다. 비빔막국수(8000원)엔 명태회무침인 ‘명태 식혜’를 얹어낸다. 잡내 없이 삶아낸 수육(1만9000원)이나 찐만두(9000원)를 곁들이는 이들이 많다. ‘아들바위공원’ 부근 소도리는 카페 감성의 한식집. 옛날 집을 식당으로 개조한 공간에서 고추장 돼지불고기 정식, 소고기 뭇국, 동치미 비빔밥 등을 정갈하게 선보인다. 메뉴 가격은 1만~1만2000원 선. 1·3주 수요일과 매주 일요일은 쉬고, 문 여는 날에도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한다.
병산동 병산옹심이골목엔 따끈한 감자옹심이(새알심) 한 그릇에 감자적(감자전)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모여 있어 부담 없이 맛볼 수 있다. 토속 음식 말고 가벼운 한 끼를 찾을 땐 안목 해변이 내다보이는 ‘오션 뷰’ 수제 버거 맛집 버거웍스가 있다. ‘웍스 버거’ ‘하와이안 버거’ ‘칠리치즈 버거’ ‘어썸 버거’ 등 두툼해서 도무지 고상하게 먹기 버거운 수제 버거(9500원부터)가 기다린다.
포남동 카페 스프라우츠는 주택가 골목에 있는데도 비건 빵을 찾는 ‘빵지 순례’객들 사이 입소문 났다. 천연 발효해 만든 베이글, 바게트 맛집이다. 잠봉뵈르와 잠봉 에멘탈 샌드위치, 올리브 치즈 바게트 등이 인기다. 목~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