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학원생 '안'은 기숙사 우편물로 막 도착한 임신 확인서 봉투를 보자마자 찢어버린다. 단 한 번의 실수, 임신중절이 형법상 '태아 살인'에 준할 정도로 엄격했던 시기. 낳으면 미혼모가 되고 낳지 않으려면 감옥에 가야 하는 '길 없는 길'에서 안은 작은 손거울과 기다란 철제 뜨개질바늘을 손에 쥔 채 혼자 조용히 누워 다리를 벌린다. 프랑스 영화 '레벤느망'의 손 떨리는 한 장면이다. 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장직을 맡았던 2021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해 화제가 됐던 그 영화다. '레벤느망'과 함께 영화 '스펜서' 등 최근 개봉한 여성주의 영화들이 극장가에 개봉해 극찬받고 있다.
◆ "여자를 집에 있게 하는 병"
'레벤느망'은 1963년 프랑스의 평범한 대학 기숙사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석사학위 논문 제출을 앞둔 주인공 안은 교수와 동기들에게 인정받는 총명한 수재다. 어느 날, 3주째 '그 소식'이 없자 몸이 예전과 다름을 직감한 안은 "임신이 확실하다"는 의사 소견을 듣는다. 만남은 짧았고, '그'와의 밤은 단 한 번뿐이었다. 안은 이제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당대 프랑스 법률에서 낙태는 시술자와 피시술자가 함께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중범죄였다. 그러나 쾌락 이후 남성과 여성은 책임의 무게가 달랐다. 임신은 여성이 해결해야 할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다. 시술을 요구하는 안에게 의사는 몰래 유산방지제를 주사하고, 친했던 친구들은 안을 외면한다. 안은 "임신은 여자를 집에 있게 하는 병"이라고 믿으며 끔찍한 시도를 차례로 진행시킨다. 안이 화장실에서 친구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장면이 압권인데, 그 대목에선 관객 누구도 숨을 쉬지 못했다. 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레벤느망'은 사건(event)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영화는 20대 여성에게 일어났던 '일회성 사건'을 통해 여성이 겪는 사회 폭력의 보편성을 상징해내고 있다. 임신 사실을 안 뒤 드문드문 들리는, 현(絃)이 끊어지는 듯한 악기 음은 그녀가 임신을 전후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시간에 내던져졌음을 은유한다.
오드레 디완 감독은 이 작품에서 모성 자체를 배격하지는 않는다. 안 역시 빠듯한 살림에 자신을 키워낸 엄마를 동경하고 사랑한다. 다만 '언젠가 아이를 낳고 싶지만, 아직은 모든 생을 던져버리고 싶지 않은' 심리에 주목한다. 영화는 임신중절의 합법·불법성의 이분법에 주인공을 가두지도 않는다. 상영시간 100분 내내 카메라는 안의 옆모습에 집중한다. 관객이 안의 입장에서 낙태의 육체적 통증과 심리적 고통을 동시에 들여다보길 권하는 것만 같다.
◆ 대중의 인형이 된 왕세자비
'스펜서'는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가 겪은 3일을 시간순으로 다룬 영화다.
때는 크리스마스이브. 여왕 주재 가족 만찬을 앞둔 시간이지만 결혼 10년 차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보이지 않는다. 경호원 없이 혼자 차를 몰다 길을 잃은 것. 길거리 식당에 무작정 들어간 그는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는 주인에게 쑥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근데, 여기가 어디죠?" 왕세자비의 난데없는 출연에 손님들은 입을 쩍 벌린다.
격식과 질서는 다이애나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왕실은 불합리한 공간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 가족 만찬 전엔 반드시 몸무게를 재야 했는데 그 이유는 '식사 후 최소한 1.4㎏을 찌워야 한다'는 웃지 못할 전통 때문이었다. 파파라치는 '21세기 신데렐라' 다이애나의 모든 순간에 셔터를 눌러댔지만 정작 남편에겐 애인이 따로 있었다. 다이애나는 대중을 위해 던져진 가짜 신부, 인형이었다. 거식증, 자해, 정신착란을 겪던 다이애나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결별을 결심한다. 다이애나가 진주목걸이를 뜯어 한 알씩 씹어 삼키는 장면, 꿩 사냥 중인 남편에게 '두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맞서는 장면이 압권이다. 청바지를 입은 다이애나가 리바이스 패딩을 두 아들에게 입히고 런던 타워브리지 앞 벤치에 앉아 KFC 햄버거에 콜라를 마시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주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스펜서'로 이미 여우주연상 트로피 27개를 거머쥐었다. 28일(한국시간) 오스카 여우주연상 발표를 앞두고 있다. 스튜어트는 작년 개봉한 영화 '세버그'에서 프랑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의 아이콘 배우 진 세버그를 완벽하게 연기한 바 있다. 영화 '세버그'도 '스펜서'처럼 이제는 세상에 없는 실존 여성을 담은 영화다. 공교롭게도 '레벤느망' 역시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실제 경험이 담긴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어, 세 편 모두 실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