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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명저를 찾아서] 할아버지의 손자 양육 일기, '양아록'

황태자의 사색 2022. 3. 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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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명저를 찾아서] 할아버지의 손자 양육 일기, '양아록'

16세기 풍미한 유학자 이문건
유배지에서 손수 손자 키우며
그 성장 모습 양육일기로 남겨

손자 크는 모습에 즐거워하고
전염병 앓자 노심초사하는 등
아이에 대한 애정 세세히 담아
때론 교육위해 매질도 했지만
조부로서 아픈 맘 표현하기도

  • 입력 : 2022.03.19 0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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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유행이 3년째인데도, 그 기세는 여전하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고, 실록이나 개인의 문집 등에는 당시의 힘든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16세기 살아간 학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경상도 성주에서의 유배 생활 기간에 직접 손자를 기르며 그 자라나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양아록(養兒錄)'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할아버지가 쓴 양육 일기라 할 수 있는데, 당시에도 전염병으로 고통받던 시대상이 나타나 있다.

손자 숙길은 세 살이 되던 해에 학질(虐疾)을 앓았다. "계축년(1553년) 윤5월에 처음 앓기 시작해 27일 한열(寒熱)이 났다. 아이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고통스러워하는데 처음에는 학질인지 알지 못하였다. 29일에 또 아프다고 했다. 4월 2일, 4일, 6일 모두 먼저 몸이 차가워지고 그 후에 열이 났다. 8일에 나무에 빌고 나서 좀 나아진 듯했지만, 다시 11일에서 16일까지 음식을 먹지 못했다. 17일 저녁부터는 곤히 자서 한열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때부터 병이 낫는 듯하다 끝내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몸이 몹시 야위어 측은했다"고 하여, 손자가 학질을 앓던 경과를 기록하였다. 학질은 말라리아 병원충을 가진 모기에 의한 전염병으로, 설사, 구토, 발작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병에 걸리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포악할 '학(虐)' 자를 쓴 것이다. 지금도 매우 힘든 상황에서 겨우 벗어났을 때 '학을 뗐다'고 하는데, '학질'에서 유래한 말이다.

손자는 3년 후인 1556년 마을을 휩쓴 천연두에 또 걸렸다. "1556년 봄과 여름에 역기(疫氣)가 연이어 마을에 돌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홍역이라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천연두였다. 병은 먼 곳에서부터 점차 가까운 이웃에 퍼졌는데, 먼저 아이들에게 옮을까 두려웠다…열하루에 자세히 살펴보니 팔뚝과 얼굴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 있었다. 이때부터 멈추지 않고 반점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사흘 동안 세 차례나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배라는 불우했던 시절, 1551년 1월에 태어난 손자는 이문건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이빨이 나고 걷기 시작하는 모습 등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문건은 '양아록'을 쓴 동기에 대해,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려고 해도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으며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독하게 거처하는데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습좌(習坐), 생치(生齒), 포복(匍匐)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고 하여, 귀양살이의 고독함 속에서 희망을 준 손자의 성장에 즐거워했다. 여섯 달 무렵 아이는 혼자 앉을 수 있게 되었고, 일곱 달에는 아랫니가 생겨 젖꼭지를 물었다. 9개월이 지나자 윗니가 생겼고, 11개월 때 처음 일어섰던 모습은 "두 손으로 다른 물건을 잡고 양발로 쪼그리고 앉았다. 한 달을 이렇게 하더니 점점 스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아이는 글을 읽는 할아버지의 흉내를 냈다. 이문건은 "손자가 커가는 것을 보니 내가 늙어가는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면서 손자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손자가 학질이나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에 걸리자, 노심초사했던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13세부터 손자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와의 갈등이 커졌다. 손자가 만취해서 돌아오던 날 이문건은 가족이 모두 손자를 때리게 하는 체벌을 했다. 하지만 손자의 술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공부나 태도 문제 등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벌어졌다.

이문건은 '양아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손자에게 매를 자주 대는 자신에 대해 "늙은이의 포악함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듯하다"면서 반성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며 손자에 대한 야속함과 함께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였다. '늙은이가 화낸 것을 탄식함'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이문건은 '양아록'을 쓰지 않았다. 손자가 장성하여 더는 자신이 품을 수는 없는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