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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국가 참여 달러 결제망서 러 퇴출, 핵폭탄급 위력

황태자의 사색 2022. 3. 1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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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국가 참여 달러 결제망서 러 퇴출, 핵폭탄급 위력

중앙선데이

입력 2022.03.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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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으로 보는 글로벌 경제 

서방의 경제제재로 러시아 루블화가 연초 이후 미국 달러 대비 가치가 90% 폭락했다. [뉴스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한 미국과 유럽 등 동맹국들의 대(對)러시아 경제제재 속에 러시아 경제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루블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고, 글로벌 기업들이 속속 러시아를 떠나고 있다. 러시아 경제가 약 30년 전인 구소련 수준으로 후퇴할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에 빠져 100여 년 만에 ‘국가 부도’를 맞이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외교정책연구소(FPRI)는 14일(현지시간) “향후 5년 이상 러시아인들은 1990년대 수준이나 그보다 더 열악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대러 경제제재는 전방위적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부터 시작된 경제제재는 자산 압류와 동결, 비자 제한,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 금지, 러시아 기업 투자 금지, 첨단 기술 관련 제품 수출 통제 등 금융·수출제재를 망라하고 있다. 제재 대상도 러시아의 수많은 기관과 주요 개인으로 광범위하다. 서방의 경제제재 앞에서 러시아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래서다.

미 상무부, 대러 수출 통제 조치

경제제재는 외교와 군사개입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다. 외교로는 불충분하고, 그렇다고 군사개입을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을 때 경제제재 카드를 꺼내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이나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같은 경제제재의 근거는 ‘역외적용(域外適用)’이다. 역외적용은 한 나라의 영역 외에서 발생한 법률문제에 대해 자국의 법 즉, 국내법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 안보·외교 차원에서 해외에서 발생한 사안에 대해 미국이 자국법을 적용해 제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제재나 수출통제 적용 대상은 미국인 혹은 미국 거주자가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사용하거나 미국산 물품을 수입하고, 재수출하는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런데, 러시아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한 강대국인데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이는 기축통화(基軸通貨)인 달러를 매개로 전 세계의 금융시스템이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기축통화는 나라와 나라 간의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다.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원유나 금 등 원자재나 곡물을 거래할 때 달러를 사용한다. 국가 간 결제 수단인 만큼 한 나라의 달러 보유 비중 등은 그 나라의 경제적 위험도를 평가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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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달러는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으로 기축통화가 된 이후 국제지불결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벨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결제시스템(SWIFT·스위프트)과 미국 내 은행 간 결제시스템인 칩스(CHIPS)를 활용한다. 스위프트는 전 세계 200개 이상 국가의 1만1000여 개 금융기관이 이용하는 세계 금융의 핵심 인프라다. 미국의 제재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제재 대상에 오를 경우 미국 금융시장은 물론 스위프트 등 국제결제 인프라 접근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 금융시스템에서 러시아를 단절시키는 한편 수출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 수출입 대금 결제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 배제는 금융제재 중에서도 핵폭탄급에 속한다.

세계 금융시스템에서 배제되면 곧바로 나라의 신용등급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달러 결제를 할 수 없게 돼 빌린 돈의 원금이나 이자를 줄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다른 나라에서 달러를 빌려올 수도 없다.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 이후 국제신용평가사들이 앞다퉈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강등한 것도 그래서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17일에도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CCC-’에서 한 단계 더 낮은 ‘CC’로 강등했다. 이날 러시아 국채 투자자들이 제 때 이자를 수령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였다.

미국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미국은 달러를 앞세워 러시아와 같은 제재 대상 나라가 미국 금융시스템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 비(非)미국인을 제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직접제재(Primary Sanction)와 2차제재(Secondary Sanction)가 있다. 직접제재는 미 국내법이 적용되는 미국 관할권이나 미국 관련 거래(U.S. Nexus)에 대해 금지하는 것이다. 미국 관련 거래는 미국인의 관여, 미국산 제품, 미 달러로의 결제 등과 관련돼 있다. 2차제재는 미국인이 아닌 자에 대해 미국 관련 거래가 없는 일정한 거래에 부과하는 제재를 총칭하는 것이다. 2차 제재는 마약 밀매, 테러, 인권 침해, 특정 개인과 기업 거래를 포함한다. 직접제재는 제재 대상자와의 거래 제한을 미국인으로 한정하나, 2차제재는 비미국인에게도 적용한다.

경제제재를 관리하고 집행하는 미국 재무부 해외재산관리국(OFAC)의 힘도 막강하다. 미국은 OFAC를 앞세워 다양한 금융제재를 시행해 왔는데, OFAC는 정기적으로 개인·기업·단체·국가를 제재 대상(블랙리스트)인 SDN(Specially Designated Nations)에 등재한다. 미국 규정에 따르면 블랙리스트에 오를 경우 지역에 상관없이 블랙리스트와의 직·간접적인 거래가 금지된다. 또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인과의 거래가 일체 금지된다. 자산 동결은 가장 강력하고 전면적인 금융제재 중 하나다. 미국은 러시아 고위 관료와 그 가족 15명, 러시아의 VTB은행 및 VTB은행의 해외 자회사 같은 러시아 금융기관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전면적인 자산 동결 조치를 취했다. 자산이 동결된 은행이나 개인은 자금 흐름이 막히면서 파산 위기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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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AC의 블랙리스트 등재가 무서운 건 제재 대상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기축통화인 ‘달러’가 관련된 것만으로도 블랙리스트 등재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된다. 전 세계 어느 은행, 전 세계 주요 기업은 OFAC가 마음만 먹으면 대부분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는 셈이다.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업이나 사람이 5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도 블랙리스트와 똑같이 자산 동결 대상이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0년 홍콩 전·현직 관료와 중국 관료 등 11명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바 있다. 같은 해 12월에는 중국 군산복합체 관련 44개 기업을 이 목록에 올렸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이를 이어 받아 지난해 3월 홍콩자치법 관련 제재 대상자를 34명으로 확대했으며, 6월에는 중국 군산복합체 투자제한 기업을 59개로 확대한 바 있다.

서방, 대러 경제제재 전방위적

환거래계좌(correspondent account)와 대리지불계좌(payable-through account) 제재도 상당한 금융제재 중 하나다. 현재 환거래·대리지불계좌 제재 대상은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Sberbank)와 스베르방크 자회사 25개를 포함한 26개 금융기관이다. 러시아를 비롯해 6개국의 은행과 신탁사, 보험사가 포함돼 있다. 환거래·대리지불계좌 제재 목록(CAPTA List)은 블랙리스트와는 구별된다. CAPTA 제재 대상자는 미국 내에서 환거래계좌와 대리지불계좌의 개설과 유지가 사실상 금지된다. 이에 따라 모든 미국 금융기관은 30일 이내 스베르방크 등 제재 대상자의 환거래·대리지불계좌를 폐쇄하고 이들 제재 대상자와 관련된 모든 거래를 거절해야 한다. 스베르방크는 달러 거래를 할 수 없는 셈이다.

이 같은 금융제재와 함께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는 수출통제규칙 EAR을 개정해 대러 수출 통제 조치도 취하고 있다. EAR 대상 품목은 미국산 부품·소프트웨어나 미국 기술을 포함한 부품이다. 다음으로 미국산 기술,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완성된 제품이 특정국에 수출되는 경우에 제재 대상이다. 여기서 제품은 미국산 기술 또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직접 생산된 제품(프로세스와 서비스 포함)을 의미한다. 미국 수출 통제의 대상이 되는 제품을 수출하는 경우에는 BIS의 수출허가가 필요하다. 러시아의 경우 최소기준이 엄격하다. 우리 기업이 생산한 특정 제품에 아주 조금이라도 미국산 부품을 포함하면 EAR 통제 대상에 해당한다.

통제대상리스트(전자기기, 컴퓨터, 통신기기와 암호장치, 센서와 레이저, 항법과 항공전자, 해양, 추진장치 등)의 신규 허가 요건을 추가해 허가 요건을 강화했다. 미국 외에서 생산된 외국산 제품도 해당한다. 미국산 소프트웨어·기술로 생산된 제품, 미국산 소프트웨어와 기술의 제품인 특정 공장 또는 설비에 의해 생산된 제품이면 EAR 적용대상이 된다. 그 결과 러시아로 수출시 허가가 필요하다.

제재는 국제사회의 일원에 대한 페널티로서 의미가 있다. 물론 제재의 효과성과 국제 금융시스템에서 미국의 중심적 역할에 논란도 제기돼 왔다. 혹자는 미국이 예외적으로 부여된 달러의 ‘과도한 특권’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의 대러 금융제재가 핵폭탄급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이 같은 주장에 더 힘이 실릴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정학적 관점에서는 물론 글로벌 금융시장의 관점에서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이유다.

조원경 울산시 경제부시장. 울산시 경제부시장. 연세대,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경제·금융을 공부했다. 행정고시(34회)로 공직에 진출했고 OECD대한민국정책센터 조세센터본부장,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국제금융심의관을 지냈다. 저서로는 『앞으로 10년 빅테크 수업』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