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각 부처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한다. 여성가족부 폐지와 디지털미디어혁신부의 신설이 거론되고,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해묵은 통상기능 쟁탈전을 또다시 시작하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부 조직을 난도질해왔지만 성공했다는 평가는 없었다. 조직을 위한 개편이었지 국민을 위한 개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부 조직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즉 공직자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공무원이 왜 돈키호테가 되었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지난해 한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하였다. 유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란다. 그런데 축제의 분위기도, 감격하는 국민도 없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다. 현명한 국민은 중진국 함정에 빠진 우리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선진국이 70년에서 130년 걸린 경제성장을 한국은 불과 25년 만에 해냈다고 칭찬한 바 있다. 원조를 받던 불쌍한 나라가 원조하는 의로운 나라로 거듭나게 한 한강의 기적이 진정 기적인 것은 경제성장의 3대 요소인 자본, 기술, 자원 중 단 하나도 갖지 못한 채 경제성장에 성공했다는 예외적인 사실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경이적인 발전에 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있었다. 선진국을 벤치마킹한 정책,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자, 선진 기술을 체화한 기술자,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은 기업, 세계적인 기업을 일으킨 기업가 등 제각기 강조하는 측면이 다양하다. 그런데 이렇게 우수한 민족적 잠재력이 시대 환경에 맞게 발현되도록 정책적으로 유도한 사람은 결국 고위 공직자였다. 그래서 세계 어떤 석학도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논할 때 엘리트 공무원을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경과 칭송의 대상이던 바로 그 엘리트 공무원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철밥통 관피아로 낙인찍혀 조롱과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던 IMF 외환위기를 전후해 일어난 일이다. 한강의 기적 일등 공신이 어느 순간 경제 파탄의 원흉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사실 그동안 공무원 개개인의 직무 역량은 크게 향상되었고 보수, 교육훈련, 휴가 등 직업 환경도 대폭 개선되었다. 그런데 업무 성과는 도리어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공직자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와 함께한다. 농업국가가 영토 확대를 통해 농업 생산을 증가시키는 병영국가로 발전했다면, 산업국가는 경제활동을 통해 가치 창출을 증가시키는 정책국가로 발전한다. 병영국가 발전의 주역이 전쟁을 수행하는 장군이라면 정책국가 발전의 주역은 정책을 집행하는 고위 공무원이다. 산업혁명 이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국가들의 군대는 경기병(輕騎兵) 후사르(Hussar)에 의존했다. 특히 폴란드는 윙드 후사르(Polish Winged Hussars)를 앞세워 17세기 유럽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683년 빈전투(Battle of Vienna)에서 폴란드의 후사르가 오스만튀르크를 물리치지 못했더라면 전 유럽이 무슬림화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윙드 후사르는 전설이 되었고 최근 게임 캐릭터로 더 유명해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갑부대에 포위된 용감한 폴란드 기병대는 항복 대신 돌격으로 옥쇄를 선택했다. 종군기자의 눈에 비친 "어리석은 폴란드 기병의 돌격"은 풍차를 향한 돈키호테의 허망한 돌진일 뿐이었다. 시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영웅이 어릿광대로 전락한 것은 폴란드의 후사르나 한국의 엘리트 관료나 결국 마찬가지인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 고급 공무원들은 아직도 한강의 기적을 이룬 그 시절 그 방법 그대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제의 시대에서 탈규제의 시대로
한국이 경제 개발을 시작하던 산업화 시대에는 소위 기간산업(key industry)이라는 것이 있었다. 에너지, 기계, 섬유, 화학, 전기, 철강 등이다. 이들 기간산업 없이는 산업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선진국 기간산업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엘리트 관료의 역량이었다. 선진국 사례를 재빨리 모방하도록 민간기업을 지도하는 것이다. 섬유, 조선, 가전 등 당시에 국제적으로 비교우위 달성에 가장 유리한 특정 산업을 꼭 집어 지정해 주는 것이다. 이런 포지티브 규제는 규제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다. 기업에 선택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기간산업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주를 위한 제한된 범위의 산업화 시대와는 달리 취미, 여가, 건강, 행복 등에서 가상현실에 이르기까지 무제한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지식산업 시대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새로운 산업들이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한다.
이제 정부는 특정 산업을 지정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럴 능력도 없다. 기업이 절대로 하면 안 될 최소한의 규제만 하는 네거티브 규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야 기업가와 기술자는 제각기 가장 잘해낼 수 있는 업종과 기술을 선택할 수 있고 최고의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규제의 시대가 가고 탈규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선진국을 따라 해야 성공하던 시대에서 따라 하면 실패하는 시대로 변해버렸다. 과거 벤치마킹에 최적화된 엘리트 공무원은 일반행정관료(generalist)이다. 광속으로 변해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수많은 신기술과 신산업을 이해할 수 없다. 어디에서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모르면 확신이 설 때까지 일단 보류시키는 것이 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책임지는 공직자의 자세이다. 게다가 무조건 규제하면 일단 사고는 터지지 않는다. 그래서 규제는 공무원의 보신책으로도 안성맞춤이다. 국가 경제가 성장동력을 상실하는 것은 본인이 이미 승진 또는 은퇴한 다음의 일이 될 터이니 말이다. 잘못한 것은 책임져야 하지만, 안 한 것은 책임질 일도 없다. 그래서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이 최선의 처세요, 성공 비결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사람이 잘못된 이유는 공직 인사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정부혁신, 직무군제도가 정답이다
문제는 고급 공무원이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공직사회에 뛰어든 열혈 청년 영재를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와 탈규제의 전문정책관료로 육성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일반행정관료만 양산하는 한국 공직사회의 인사제도, 특히 부처 내 순환보직(循環補職)이 문제의 근원이다. 공무원은 부처에 소속된다. 그리고 승진과 전보를 통해 다양한 보직을 순환한다. 장점은 다양한 경험으로 넓은 시야를 갖고, 한 보직에서 이해 당사자와의 유착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방경제와 인허가 업무 위주의 일반행정관료 육성에 최적화된 인사제도이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4차 산업혁명과 미래지향적 진흥 업무에 적합한 정책전문관료를 육성할 수 없는 전근대적 인사제도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직위분류제 같은 선진국 제도를 단편적으로 도입하는 땜질식 처방을 반복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개방형 임용제의 실패, 교육훈련과 평가제도의 한계 등 백약이 무효였다. 또한 새 정부마다 반복되는 부처 행정 조직의 개편은 공직자를 더욱 힘들고 불안하게 할 따름이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인센티브 시스템의 재구성이다. 청년 관료를 서로 다른 다양한 업무에 순환보직하면 일반행정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유사 업무에 계속 종사하도록 하면 정책전문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 개 부처 내에는 유사 업무가 많이 없어 승진과 전보에 제한이 있다면, 부처의 벽을 넘어 범부처적으로 승진과 전보가 가능하도록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을 직무군(職務群)제도라고 부른다. 한국 관료사회에 맞는 정책전문관료 양성에 최적화된 공직 인사제도이다. 고급 공무원이 승진하기 좋은 보직이라는 인센티브에 따라 순환보직하면 무능한 만능관료가 된다. 그러나 직무군과 직무렬제도를 통해 전문성이라는 인센티브에 따라 진화한 관료는 미래지향적인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유능한 정책전문관료(specialist)로 거듭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