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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뱀파이어의 식성은, 선지와 와인 사이?

황태자의 사색 2022. 3. 27.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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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뱀파이어의 식성은, 선지와 와인 사이?

[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영화 ‘박쥐’

이용재 음식평론가
입력 2022.03.26 03:00
 
 
 
 
 
영화 ‘박쥐’에서 신부인 상현(송강호)이 성찬식 미사를 집전하며 봉헌한 붉은 포도주. /CJ ENM

“태주씨, 내가 신부라서 날 좋아했어요? 아니잖아요. 신부는 그냥 직업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뱀파이어인 것도 그냥 뭐… 식성이나 생활의 리듬 문제, 그런 게 아닐까?”

어라, 말 되네. 영화 ‘박쥐’ 속 상현(송강호)의 강변이 의외로 설득력 있어 깜짝 놀랐다. 자신이 뱀파이어임을 밝히자 질겁하는 태주(김옥빈)를 진정시키려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건만 그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특히 식성 이야기가 그렇다. 그가 본의 아니게 뱀파이어가 되어 밝히는 게 인간의 피라 문제가 될 뿐이지, 사실 우리도 다른 동물의 피를 먹는다. 철분과 칼륨이 듬뿍 있으니 피는 영양가가 충분한 식재료다.

그래서 세계 음식 문화에는 동물 피를 활용하는 음식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일단 우리 한국인만 하더라도 해장국의 핵심 재료로서 선지를 즐겨 먹는다. 어디 한 군데를 꼽기가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선짓국 맛집이 널린 가운데, 이 글을 쓰는 지금 당장은 청진옥의 해장국이 생각난다. 아무래도 빨갛지 않은, 비교적 맑은 국물이 부글부글 끓지 않고 바로 퍼 먹기 딱 좋은 온도로 나오기 때문이리라.

최근에는 대구 맛집이라는 교동 따로식당의 선지해장국을 간편식(레토르트)으로 사 먹어 보았다. 팬데믹 시대를 맞아 돼지국밥 등 전국 유명 식당들의 국이 본격적으로 간편식이 되어 출시되는 가운데 선짓국이 적었던 터라 반가웠다. 맛은, 당장 찾아가 먹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역할 정도는 그럭저럭 해낸다. 이 밖에도 우리에게는 피순대, 서양에는 같은 원리로 만든 소시지 부댕 누아르(boudin noir) 같은 음식도 있다.

한편 피는 상징성 또한 만만치 않게 강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흘린 피가 기독교 교리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박쥐’의 주인공 상현이 신부라는 설정은 꽤 복잡한 의미로 다가온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그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 속수무책으로 좌절한다. 매일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실에서 고작 기도밖에 해줄 수가 없는 처지에 무력감도 느낀다. 고민 끝에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임마누엘 바이러스 백신 개발의 실험 대상으로 자원한다. 그런데 바이러스의 치명률은 100퍼센트. 결국 감염돼 죽지만 수혈받은 피가 그를 부활시킨다. 하지만 부활에는 대가가 따랐으니 그는 인간의 피를 마셔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뱀파이어가 되어 버린다. 이제 성찬식에서 마시는 예수님의 피(와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인간의 피를 갈구하게 된 것이다.

 

상징적인 피를 마시던 성직자가 실제 피를 마셔야 하는 흡혈귀가 되어 버렸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영화 속 미사의 성찬식에 등장하는 와인 또한 유난히 붉어 시선을 잡아끈다. 잠깐, 원래 성찬식용 와인은 화이트를 주로 쓰지 않았던가? 지금은 발을 끊었지만 오랫동안 천주교 신자였던지라 체득한 지식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전례 규정에 따르면 레드와 화이트 모두 미사주로 쓸 수 있는데, 개별 성당에서 신부들이 재량에 따라 고를 수 있다. 다만 수단이나 제대에 흐르거나 튈 경우 화이트가 덜 표가 나므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피, 그러니까 가톨릭의 미사주는 피의 상징성만큼이나 입지와 전통이 굳건하다. 원래 미사주는 외국산을 썼으나 운송 과정에서 깨지는 등 관리가 쉽지 않던 차, 1977년 마주앙이 국내 개발되면서 그해 9월 로마 교황청 승인을 받아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현재 마주앙은 대체로 외국의 원액을 섞은 제품을 내놓고 있지만 미사주만큼은 경북 경산의 전용 농장에서 재배한 국산 포도 100퍼센트로 빚어 쓴다. 역시 경산의 롯데주류 공장에서 화이트와 레드 6만리터씩 생산하는데, 부활절 전 상반기와 성탄절 전 하반기에 각각 이틀씩 1년에 나흘만 작업한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집전한 미사에서도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