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음악상 한스 치머, 전기차를 악기로 삼다
오스카 음악상 한스 치머, 전기차를 악기로 삼다
인셉션·배트맨 등 영화음악 거장, 올해는 ‘듄’으로 또 한 번 트로피
28일(한국 시각)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SF 대작 ‘듄’이 오스카 최다 부문(6관왕) 수상작이 됐다. 6개의 트로피 중에는 음악상도 있었다. 이 영화의 독일 출신 음악감독 한스 치머의 작품이다. 1995년 ‘라이온 킹’ 이후 두 번째 오스카 수상이다.
같은 날 이 소식에 기뻐한 자동차 회사가 있다. 준중형 전기차 모델 ‘i4′를 만들고 있는 BMW다. 이 회사는 이날부터 i4를 한국에 공식 출시했다. 사전예약분만 3700여 대. 이 모델에는 치머가 작곡한 ‘배기음’이 장착돼 있다. ‘부릉’ 하는 기존 배기음이 아닌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사운드를 지닌 전기차다.
전기차가 영화음악 오스카 거장의 소리를 입었다. 내연기관이 퇴출된 전기차는 사실 엔진 배기음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BMW가 전기차 배기음을 다시 작곡해 차량에 입힌 첫 번째 이유는 규제 때문. 배기 소음이 사라지자 보행자, 특히 시각장애인이 충돌할 위험이 커진 것이다. 유럽연합(EU)과 미국에서 먼저 관련 규제가 생겼고, 우리나라도 2020년 7월부터 전기차의 가상 배기음 장착이 의무화됐다. 운전 만족감도 배기음이 돌아온 이유다. 이 소리가 있어야 ‘운전할 맛이 난다’는 것이다.
전기차 배기음 작곡을 위해 오스카 거장 음악가를 영입한 건 BMW가 처음이다. 치머는 2017년부터 이탈리아 음향악 전문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렌초 비탈레와 자신의 개인 작업실에서 거대한 전자음 입력장치를 두고 각종 배기음 소리를 실험해왔다.
왜 하필 치머였을까. 업계에서는 BMW가 한스 치머의 ‘치머레스크(Zimmeresque)’ 별명을 선택했다고 본다. 단순한 영화 음악을 넘어 음악에 관한 치머의 세계관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인셉션(2010)’,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 인터스텔라(2014), 그리고 이번 오스카 수상작 ‘듄(2021)’ 등, 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 세계 속의 음악을 선보여왔다. 이 대목이 미래지향적인 전기차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치머는 특히 최근 전기차 작곡에 쓰이는 ‘셰퍼드 음(Shepard tone)’의 대가다. 이는 특정 음의 구간을 중첩시킴으로써 마치 음이 끝도 없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착각을 주는 작곡 기법이다. 영화에서는 주로 우주선 이·착륙,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면에 쓰여 왔다. 치머는 특히 이번 오스카 상을 받은 영화 ‘듄’은 물론 ‘덩케르크’,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 등에서 각종 전자 현악기로 이 소리를 탁월하게 활용해왔다.
다른 브랜드에서는 포르셰가 이 셰퍼드 음을 이용해 SUV 전기차 ‘타이칸’의 배기음 작곡을 시도한 바 있다. 마치 우주선이 막 출발하는 듯한 소리로, 부스터 음을 연상케 하는 구간을 집어넣어 기존 엔진 배기음의 느낌과 빠른 속도감을 살렸다. 이에 비하면 치머의 음은 상대적으로 평평하다. 그는 “’덩케르크’ OST를 생각하며 BMW 배기음을 작곡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긴장감 대신 안정감이 느껴지도록 셰퍼드 음 화음을 구성한 것이다. 지나친 긴장감이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밖에도 치머는 배기음 외 BMW 전기차에 들어가는 각종 전자버튼음도 평소 영화음악에서 즐겨 쓰던 합창단 소리 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치머는 “운전은 결국 운전자가 자신의 곡을 쓰거나 연주하는 행위라고 보고 배기음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연주하는 운전. 오스카 수상자는 그렇게 전기차를 자신의 악기로 삼고 있다.
☞셰퍼드 음 (Shepard tone)
음이 끝없이 올라가거나, 하락하는 느낌을 주는 일종의 착청 현상이다. 옥타브는 다르지만 음계가 같은 음 여러 개를 중첩시키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