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합병 ‘거래상대방 리스크’ 안전장치 마련해야
인수합병 ‘거래상대방 리스크’ 안전장치 마련해야
M&A의 세계
지난해 5월 시작한 남양유업의 경영권 매각이 첩첩산중이다. 매각 논란이 최근 오히려 확산하며 성사가 불투명해진 모양새다.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가 홍원식 회장을 상대로 매매 계약 이행을 요구하며 법정 다툼을 이어가는 가운데, 대타로 등장했던 대유홀딩스마저 홍회장의 계약 불이행을 문제 삼아 계약 해지를 선언한 것이다.
분쟁은 거래 참여자 모두에게 손실이다. 거래를 종결하지 못하고 있는 한앤컴퍼니는 3000여억원의 자금이 묶였다. 고수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에게 자금이 묶인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이미 지급한 계약금 320억원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해진 대유홀딩스는 직접적 손실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매각 당사자인 홍 회장 등 남양유업의 오너 일가도 법률 대리 비용 등으로 손실이 늘어나고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남양유업의 임직원, 대리점 및 투자자들도 유탄을 피하기 어렵게 된 상황이다.
투자자와 이견으로 장기간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교보생명도 비슷한 사례다. 2012년 교보생명에 투자를 집행한 사모펀드들은 2015년 9월까지 기업을 공개(IPO)하겠다는 약속이 불발되자, 계약서에 명시된 풋옵션(특정 가격에 주식을 되팔 수 있는 권리)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풋옵션 행사 가격을 두고 시각차를 좁히지 못하면서 분쟁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교보생명은 사모펀드 측 관계자들을 고발하며 형사 재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년 9월 중재 판정 결과가 나온 뒤엔 교보생명과 사모펀드 양측이 서로 승기를 잡았다며 대립했다. 교보생명 측은 최근 독자적으로 기업 공개를 추진하고 있으나, 사모펀드들은 2차 중재를 신청한 상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인수합병(M&A) 거래에서 당사자들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계약서가 모든 가능성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세상 일이라는 게 언제나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설사 거래가 성사되더라도 분쟁 가능성은 여전하다. 거래 담당자들이 바뀌는 일이 허다한 탓에 구두 약속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거래 이후에도 협상과 소송, 중재 등이 빈번한 이유다.
분쟁이 일상적인 일이라면 어째서 남양유업과 교보생명 사례가 크게 주목받는 것일까. 각 분야의 대표 업체들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할만한 사모펀드들과 업종 대표 대기업들이 분쟁 전면에 나선 것만으로도 역사적 사례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 기업이다 보니 몸값도 천문학적인 규모인데,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분쟁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우리 경제에도 부담이다.
인수합병 업계에선 ‘거래상대방 리스크’(Counterparty Risk)가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시그널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지금까지 ‘거래상대방 리스크’는 계약 상대방이 과연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충분한 자금력과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에만 고려됐다. 주로 파상상품 등 한번 사고가 발생하면 손실 규모가 엄청 클 수밖에 없는 거래들에 해당됐다. 이제 연간 100조원 규모로 성장한 인수합병 시장에서도 거래상대방 리스크가 현실화된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변화가 시장 참여자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동안 대형 인수합병 거래에서 법률 분쟁은 법무법인 등 자문사들의 조력을 받아, 거래 당사자들이 합의한 계약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특별히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러나 계약 준수의 믿음이 사라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래의 성사는 물론, 이후 상대방이 계약서를 준수하지 않는 상황까지 대비할 필요가 생겼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수합병 시장의 주요 참여자들은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업무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거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부터 상대방에 대한 공식적·비공식적 평판 조회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분쟁의 가능성을 가정하고 해결 방안들을 사전에 꼼꼼하게 계약서에 담는 것도 달라진 분위기다. 동시에 잠재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수합병 특화 보험에 가입하는 등 안전장치도 고려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국내 사모펀드에 자금을 투입하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거래상대방 리스크로 인한 분쟁이 해외 투자자의 발길을 돌리게 하진 않을 것이다. 주요 선진국에서도 다양한 분쟁을 이미 오랫동안 겪어왔기 때문이다. 결과에 주목하긴 하겠지만, 한국 시장만의 특별한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란 얘기다.
미국과 유럽 등 인수합병 선진국에선 오래전부터 거래상대방 리스크에 대비하는 절차가 일반화됐다. 국내에선 허용되지 않는 사설 평판 조회 업체가 대표적이다. 선진 시장에선 이들 업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업체들은 거의 수사에 준하는 수준으로 평판을 조사하는 업무를 대행한다. 인수합병 거래를 위한 W&I(보증과 면책)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일반적인 추세다. 인수합병 시장이 성숙할수록 국내에서도 이런 절차가 일반화 될 것이다.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 서울대에서 계산통계학 학사, 듀크대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으며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일했다. 2005년 VIG파트너스(옛 보고펀드) 설립 당시 창업 멤버로 합류한 뒤 2018년부터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