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애니 ‘돼지의 왕’, 매운맛 드라마로 돌아왔다
연상호 애니 ‘돼지의 왕’, 매운맛 드라마로 돌아왔다
티빙 12부작 드라마 ‘돼지의 왕’
학교 폭력·부조리 다룬 원작서
탄탄한 연쇄살인 스릴러로 변신
‘19금 잔혹 복수 액션’ 열띤 호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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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건 악(惡)이야. 힘을 가지려면 악해져야 돼. 계속 병신처럼 살지 않으려면, 먼저 괴물이 돼야 해.”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에서, 빈집에 모인 중학생 남자애들은 말한다. 교실에선 아이들이 집안의 부(富)와 성적을 척도로 포식자 ‘개’와 먹잇감 ‘돼지’로 나뉘고, 폭력의 트라우마는 어른이 된 뒤에도 유령처럼 들러붙어 피해자들의 삶을 헤집는다. ‘부산행’과 ‘지옥’ 이전에 이 작품을 만들었던 연상호 감독은 ‘한국 애니메이션은 ‘돼지의 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한국독립영화협회 ‘올해의 독립영화’ 선정평)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11년, 이 영화가 원작인 토종 OTT 티빙의 12부작 오리지널 시리즈가 다시 열띤 호응을 얻고 있다. 티빙 포스터 문구는 원작의 대사를 인용한 ‘누군가는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몰아보기’ 하는 이용자가 늘어, 지난달 말 공개 첫 주 대비 7·8화까지 공개된 지난주 누적 시청자 수가 2.3배 많아졌다.
원작에서 어른이 된 피해자 ‘경민’(목소리 오정세)과 ‘종석’(양익준)은 각각 파산한 사업가와 하류 대필 작가로 재회해 학교 폭력의 기억을 되짚어 간다. 그 끝에는 반복되는 비극이 있다. 반면 드라마는 어릴 적 상처를 품은 채 커버린 어른이 벌이는 피의 복수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드라마 속 ‘경민’(김동욱)은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정신적 상처가 원인이 돼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인물. 긴 시간 차곡차곡 어릴 적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를 준비해, 지능적이며 잔혹하게 실행에 옮긴다. 같은 학폭 피해자에서 경찰대 출신 열혈 경찰이 된 ‘종석’(김성규)은 ‘어릴 적 트라우마’와 ‘살인마가 된 옛 친구’라는 두 괴물과 한꺼번에 싸워야 한다.
원작은 대물림되는 사회 부조리, 아이들 사이 권력 관계를 파고드는 우화적 성격이 강했다. 반면 드라마는 피와 살점이 튀는 잔혹한 범행과 추적 과정을 그리는 연쇄살인 스릴러물로서 탄탄하다. 가해자들의 학교 폭력도 드라마에서 더 생생하고 잔인하게 묘사된다. 이들은 어른이 된 뒤에도 “철 없을 적 일을 아직도 기억하냐”며 뻔뻔히 묻거나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식으로 기억을 왜곡한 채 살고 있다. 가해자들이 주변에서 가끔 만나는 비뚤어진 어른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괴물’이 돼 벌이는 사적 복수가 상당한 정당성과 공감력을 얻는다. 학부모의 촌지를 챙기던 교사가 채용을 미끼로 뒷돈을 받는 교장이 된 학교 현장은 고장 난 교육 시스템을 상징한다.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 이후에도 군대 폭력을 다룬 ‘창’(2012), 사이비 종교를 다룬 ‘사이비’(2013) 등의 애니메이션에서 거대한 힘 아래 왜곡되는 인간 관계나 짓눌린 개인의 마음속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그는 드라마 공개 전 인터뷰에서 “11년 전 ‘돼지의 왕’의 디스토피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오히려 점점 더 고도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며 “드라마는 후반부로 갈수록 폭력이 가진 복합성을 드러내며 피해자의 복수에 대한 딜레마를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