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관계 악화는 한·미 동맹 발전에도 좋지 않아
한·중 관계 악화는 한·미 동맹 발전에도 좋지 않아
민주주의 vs 권위주의 대결과 한국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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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 전 베트남 대사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에서 세계의 가치 체계는 민주주의로 수렴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암울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스웨덴 민주주의연구소(V-Dem)는 ‘연례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정치 체제를 자유 민주국가와 선거 민주국가, 선거 독재국가, 폐쇄 독재국가로 분류한다. V-Dem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민주주의 수준은 냉전 종식 전야였던 1989년 수준으로 후퇴했으며, 민주주의 상황은 30년 전으로 추락했다.
세계 인구의 70%인 54억 인구가 독재 체제 아래 살고 있다. 이중 선거 독재국가에 34억 명, 폐쇄 독재국가에 20억 명이 산다. 자유 민주국가의 수는 2012년에 사상 최다(42개국)였으나 지난해에는 사상 최저 수준(34개국)으로 감소하였다.
보고서는 권위주의·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로 평가되어 온 동서 냉전 종식이 촉발한 세계적 민주화의 물결이 거센 역풍을 맞아 퇴보해왔음을 명확히 설명한다.
미국 주도 민주주의 연대에 한국의 전면 동참은 현실외교 측면에 어려워
한국 경제력 강해야 한·미 동맹도 강건하게 지속하고 건설적 역할 가능
한·미 동맹 발전 위해서도 친미 또는 친중의 제로섬적 사고서 벗어나야
한국 자유민주주의 지표는 세계 상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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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워치
특히 러시아·인도·필리핀·헝가리(모두 선거 독재국가로 분류) 등과 같이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들이 권력 남용을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는커녕 후퇴시키는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선거 민주주의 자체가 세계적 시련을 겪고 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정체 현상이 진행되며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확산 전략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보고서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지표(LDI)는 상위 10%인 18개국의 하나(17위)에 들어간다. 미국·영국·캐나다·일본 등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도 상위 10%에 들어가지 못하고 상위 20%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또 한국은 상위 10% 국가 중 유일하게 상당한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한 나라였다. 반면 미국은 상당히 권위주의적으로 후퇴한 나라로 분류됐다.
한국인의 눈에는 혼란스럽고 분열적으로 보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세계적인 민주주의 연구기관에서는 역동적이고 모범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V-Dem 보고서뿐 아니라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표에서도 한국은 16위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임기 중 독단적·포퓰리즘적 정치 행태가 강해지면서 자유민주주의 선도국으로서의 이미지와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정체되거나 위기적 상황에 있는 가운데 미·중 대결은 경제력·군사력뿐 아니라 가치와 이념, 체제 경쟁의 성격을 더해가고 있다. 미국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기치를 내걸고 중국 정부의 홍콩, 신장위구르 탄압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자유민주주의만이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 모범국
반면 중국은 미국 정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구식 민주주의는 쇠락해 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그 나라의 특성에 맞는 정치 체제가 국리민복을 가져올 수 있으며 중국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이러한 가치와 체제 경쟁은 국제질서 형성 과정에서 점점 더 중요하고 복잡한 요인이 되어간다.
미·중 체제 대결은 국가의 최우선 순위가 비용이 따르더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있는가, 아니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더라도 사회의 안정과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는가 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권위주의의 이점인 정책의 신속성·효율성을 살려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를 넘는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되는 인도는 1인당 GDP가 2000달러대로, 비효율적 시스템과 국가 운영 능력 부족으로 중국 경제에 크게 뒤처져 있다. 싱가포르는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비판을 받지만, 1인당 GDP가 6만 달러를 초과하며 세계적인 거버넌스 롤모델이 된 지 오래다. 이들 3개국 사례는 민주주의가 모든 나라에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측면이 있다.
빈부 격차가 심화하고 사회가 점점 양극화되어 가는 세계적 추세에서 국익에 부합하는 정책과 선거 승리를 위한 공약이 상충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회 혼란과 비효율, 포퓰리즘 등 민주주의의 비용이 점점 커지는 시대가 되고 있다.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퍼져 체제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자유·인권의 보장뿐 아니라, 사회 안정과 국민의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도 우월한 체제임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의 길일 것이다. 대표적인 모범 사례가 한국이다.
한국의 지정학적·지경학적 제약
한국은 미국이 세계 전략으로 주도해온 가치 외교의 최대 수혜자로서 단기간에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룩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군사안보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한·미 동맹의 소중한 자산으로 가꾸어 나가면서, 세계적 민주주의 발전과 확산을 위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책무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는 유엔 회원국인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를 강하게 비난하고 국제적 제재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공동체(Community of Democracies)에서도 건설적인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북한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도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통일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방향이다. 또 한국은 개발도상국의 거버넌스 향상을 위한 지원과 협력을 증대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을 향한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데 더욱 기여할 필요가 있다.
다만 한국의 국가 규모와 지정학적·지경학적 제약 등으로 인해 우리가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 노력에 전면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국익과 현실외교(realpolitik)의 측면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한국 정부가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자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중국의 자유와 인권 상황을 비판하기에는 우리의 국익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크다. 중국 인권 문제로 한·중 관계가 악화하면 우리 경제와 안보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한·미 동맹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주의 비용 최소화하면서 번영해야
한국의 경제력이 강해야 한·미 동맹도 강건하게 지속할 수 있으며, 우리 정부가 국민의 높은 지지 속에서 동맹의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파트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증진된다. 따라서 우리의 국익과 포괄적 한·미 동맹의 발전을 위해서도 친미냐, 친중이냐의 제로섬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이제는 튼튼한 한·미 동맹을 초석으로 하면서 한·중 전략적 파트너십을 발전시킨다는 선순환적 지향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해 시급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를 조속히 회복하는 일이다. 이는 가치 외교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국이 세계 민주주의 발전과 확산을 위해 담당해야 할 역할은 자유민주주의가 자유와 인권뿐 아니라 사회 안정과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장 훌륭하고 지속가능한 가치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 전략을 초월하여 국가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명한 거버넌스를 통해 민주주의의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번영하는 한국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오는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행정부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끝으로 우리 국민은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때가 됐다. 수많은 난관과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경이로운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일구어낸 주역은 한국 국민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혁 전 베트남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