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가격 폭등에 폭염까지...블랙아웃 경고등
에너지 가격 폭등에 폭염까지...블랙아웃 경고등
[WEEKLY BIZ] 수요폭발·공급부족 글로벌 전력난
원유·가스 등의 에너지 가격이 폭등한 가운데 북반구가 혹서기(酷暑期)에 접어들면서 글로벌 ‘블랙아웃(blackout·대정전)’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기온 상승으로 실내 냉방 수요가 크게 늘어난 데다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과 여름휴가 시즌 개막으로 전력수요는 폭발하고 있지만, 발전(發電) 연료 조달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 여건이 열악한 개발도상국들은 이미 블랙아웃 국면에 진입했고, 미국·유럽 등 선진국들도 전력 수요 과부하 등으로 블랙아웃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폭염에 리오프닝으로 전력 수요 폭증
한여름(6~8월)과 한겨울(12~2월)은 실내 냉난방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에너지 수요가 연중 가장 많은 시기다. 그중에서도 여름은 겨울보다도 평균 20%가량 에너지 소비가 많다. 특히 올해는 이상기후로 세계 각지에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전력수요가 폭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22년 만에 가장 더운 3월을 보낸 인도는 지난달에도 폭염이 이어져 수도 뉴델리의 기온이 49도를 넘었다. 지난달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은 평년 대비 16도나 높은 최고기온(40.3도)을 기록했다. 스페인 기상청은 낮 기온 30도를 넘는 첫날이 지난 71년 사이 한 달 정도 앞당겨졌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와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의 낮 최고기온이 지난달 각각 38.33도, 36.67도를 찍었다. 같은 달 기준으로 각각 83년, 60년 만에 가장 높은 것이다.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 기후예측센터는 올여름 미국 대부분 지역의 기온이 평년을 웃돌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올여름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 맞이하는 ‘정상적인 휴가 시즌’이라는 점도 전력 부족 우려를 키운다. 전 세계 피서객들이 호텔, 식당에 밀려들면 전력 사용량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미국 공항의 일일 교통량은 2019년 대비 90% 수준으로 회복했고, 올여름 여행 예약 건수는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개도국은 이미 블랙아웃 진입
본격적인 여름철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남아시아 지역의 개발도상국들은 벌써 블랙아웃에 들어간 상태다. 팬데믹에 따른 관광 수입 감소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상당수 국가가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빠지는 등 외화가 부족해지면서 원유, 가스, 석탄 등 주요 에너지원을 수입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인도의 경우 28주(州) 중 16주에 거주하는 7억명 이상이 하루 2~10시간가량 전기를 쓰지 못하고 있다. 인구가 3억명에 달하는 파키스탄과 스리랑카, 미얀마는 이미 전국적인 정전 사태를 겪고 있다. 블룸버그는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 가스 등을 저가에 들여오며 정전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수요를 따라가기에 역부족인 상태”라고 전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은 라트비아·체코·헝가리 등의 동유럽 국가도 올여름 일시적인 단전(斷電)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개도국에 비하면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전력 수급 사정이 한결 나은 편이다. 하지만 여름철 폭염 등으로 전력수요가 급증할 경우 예비 전력이 동나면서 뜻밖의 정전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북반구의 많은 국가가 심한 가뭄을 겪고 있어 수력발전소 가동률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도 변수다. 북미 전력신뢰도공사(NERC)는 올여름 미국의 3분의 2 지역이 블랙아웃을 경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닛케이 등 일본 언론들도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이 금지되고, 폭염이 길어질 경우 정부가 ‘계획 정전’을 실시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여름철에도 전력 예비율을 10~20%가량 확보해 놓고 있어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하지만 기저 전원(電源)으로 활용되는 석탄 조달이 어려워지면 충분한 예비 전력 확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석탄 수입량의 16.5%를 러시아에 의존한다. 정연제 에너지경제연구원 전력정책연구팀장은 “우리나라는 2011년 9월에도 전력 수요예측이 빗나가며 일부 정전 사태를 겪은 적이 있다”며 “전국에 전력 공급이 끊기는 블랙아웃 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한여름 전력수요가 폭발하면 최악의 경우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정전을 시키는 ‘순환 정전’을 시행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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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에너지원 확보 총력전
여름철 블랙아웃 위기가 커지면서 각국은 추가 에너지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은 지난 3월 전략비축유(SPR)를 사상 최대 규모로 방출한 데 이어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가한 원유 수출 제한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산(産) 에너지 의존도가 40%에 달하는 유럽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중동, 북아프리카 등의 대체 에너지 루트를 개발하는데 총력전을 펴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수급이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데다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에 따라 블랙아웃 공포가 매년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WSJ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에너지 안보 위기가 불거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외교 전략의 새판을 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운 좋게 블랙아웃을 피하더라도 전기요금 급등 공포는 이미 현실로 닥쳤다. 프랑스와 영국은 올 들어 전기료를 각각 24%, 54% 인상했고, 일본도 작년 이후 누적으로 35% 올렸다. 한국전력도 올해 20조원 적자 전망이 나오면서 전기료 인상 압박이 커지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유라시아그룹의 헤닝 글로이스타인 애널리스트는 “공급망 대란, 기후 위기, 전쟁과 씨름하는 세계에 전력난 사태가 추가될 경우 (경기 침체를 넘어) 지난 수십년간 볼 수 없었던 전 인류적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