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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등용과 난국 타개

황태자의 사색 2006. 10. 3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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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사랑] 인재 등용과 난국 타개

이이(李珥)의 제자인 서인(西人)들은 조선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다. 광해군은 전란(임진왜란) 극복에는 많은 공을 세웠지만 코드가 맞는 북인(北人)만 중용하다가 쿠데타를 맞았다.

반정 초기에는 성패 여부가 불확실했다.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전서(沙溪全書)’에는 정사(靖社) 1등공신 이서(李曙)가 “반정 초에 나라 사람들이 갑자기 광해군 폐출 소식을 듣고, 주상(인조)의 성덕(聖德)을 알지 못해 상하가 놀라 소란스러웠고, 향배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위세로써 진압하기도 어려워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광해군의 갑작스러운 폐출(廢黜)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진압할 수도 없었다는 말이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반정 세력이 처음에는 김상헌(金尙憲)의 주장대로 남인과 북인을 모두 배제하려고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곧 역량 부족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정 세력들은 반대당파였던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중용해 인심을 안정시키려 했다. 광해군 때 영의정이었던 이원익은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해서 여주(驪州)에 유배 중이었다. 이서는 “이원익이 앞 조정의 원로로서 수상(首相·영의정)에 제수되어 여주에서 입조(入朝)하자 인심이 안정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반정 세력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영의정 이원익이 광해군 때 은둔했던 장현광(張顯光)에게 나랏일을 묻자 “오늘날 나라의 큰 근심은 사람들이 의심하는 데 있다”고 답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래서 반정 세력들은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은 북인들까지 정권에 참여시켜 외연을 넓혔다. 이서는 “김장생·정경세(鄭經世)·장현광·정온(鄭蘊) 등이 차례로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 안정되어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고 마음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면서 “현인(賢人)이 국가 안위에 관계됨이 이러하다”라고 토로했다.

현 정권도 장현광의 말처럼 ‘사람들이 의심’하는 지경에 처해 있다. 이를 불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곧 있을 외교안보 라인 인사에서 국민들이 믿을 만한 인재를 등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지탄을 받는 사람들로 채운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덕일 ·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10.31 18:41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