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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셰프'로 본 SNS 경제학

황태자의 사색 2020. 8. 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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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셰프'로 본 SNS 경제학

입력2020.08.28 17:14 수정2020.08.29 02:28 지면A20

 

블로거 혹평 한줄에
레스토랑서 쫓겨난 셰프

푸드트럭으로 대박
‘최고의 양념’도 SNS였다

싸움 구경에 쑥쑥 느는 팔로어
SNS 초짜였던 칼은 순식간에
'인플루언서'로 거듭나는데…

모든 사건은 거물 블로거 램지(올리버 플랫 분)가 요리사 칼(존 파브로 분)의 음식을 먹고 남긴 리뷰 한 건으로부터 시작됐다. ‘실망했다. 칼의 추락을 보여주는 요리. 별 두 개.’ 혹평에 상처 입은 칼은 트위터로 램지를 공개 저격한다. 둘의 설전은 SNS를 통해 생중계되고 상황은 칼이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간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는 SNS 초짜였던 요리사가 하룻밤 새 ‘인플루언서’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열정 요리사 칼

주인공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요리사 칼. 본인 레스토랑도 없고 남의 식당에 고용돼 일하지만 요리 개발에 대한 열정만은 끓어 넘친다. 일에만 몰입하는 바람에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도 소원해졌지만 요리라면 누구에게도 안 밀린다. 그런 그에게도 LA에서 가장 핫한 음식 블로거 램지의 식당 방문은 떨리는 일이다. 칼은 새로운 메뉴를 야심 차게 준비한다. 문제는 칼이 새 메뉴를 시도할 때마다 태클을 거는 레스토랑 사장. 기존 메뉴대로 가라는 사장의 요구에 칼은 항변한다. “거물이 오니까 좋은 메뉴를 내야죠. 지금 메뉴는 창의성이 없어요.” “아니. 거물이니까 안정적으로 가. 그 사람 블로그가 대기업에 1000만달러(약 119억원) 받고 팔렸어. 모험하지 마.”
칼과 사장이 램지를 신경 쓰는 이유는 그만큼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램지처럼 온라인 콘텐츠로 유행을 이끄는 사람을 ‘인플루언서’, 이들을 이용한 홍보를 ‘인플루언서 마케팅’이라고 한다. 올해 전 세계 기업들이 인플루언서에게 지급하는 금액은 100억달러(약 11조8340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장의 겁박에 가까운 설득에 칼은 신메뉴를 포기한다.

구독자 수의 경제학

칼은 결국 램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램지는 ‘지루하고 진부하다’는 평가를 남긴다. 칼은 트위터에서 램지의 혹평이 수없이 리트윗되는 상황을 목격한다. 참지 못하고 램지의 트위터 계정에 욕설을 날린 칼. “요리를 면상으로 짓이기니 맛을 모르지.”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램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보인다는 걸 ‘SNS 초짜’인 칼은 모른다.
“아빠, 밤사이에 팔로어가 1653명 생겼어.” “팔로어가 뭐냐”고 묻는 램지에게 초등학생 아들은 설명한다. “1653명에게 아빠 글이 보인다는 거야.” 램지를 공개저격하면서 하룻밤 새 유명인이 된 것이다. 인플루언서 시장에선 구독자 수가 많을수록 영향력이 커진다. ‘메가 인플루언서’(구독자 100만 명 이상)들은 아예 콘텐츠 기업과 전속 계약을 하는 경우도 많다. 램지의 블로그를 대기업이 거액에 사들인 것처럼 한 회사가 해당 인플루언서의 콘텐츠 유통을 독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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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와의 설전으로 트위터 팔로어가 2만 명까지 늘어난 칼이 “계정을 삭제하겠다”고 하자 홍보 전문가는 만류한다. “아니, 왜 지워요? 이게 다 돈인데.” 미국 마케팅업체 이제아에 따르면 파워블로거의 게시물당 평균 광고비는 2014년 407달러(약 48만원)에서 지난해 1442달러(약 171만원)로 세 배가량 늘었다. 구독자가 많은 계정일수록 단가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다.

밈노믹스 주인공이 되고

램지가 레스토랑을 재방문한 날, 신메뉴를 준비하던 칼은 사장과의 마찰로 주방에서 쫓겨나고 만다. 화가 난 칼은 식당에서 난동을 부리고 이는 SNS로 생중계된다. 램지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칼의 영상이 입소문을 타고 무섭게 퍼진다. 어쩌면 좋냐며 찾아온 칼에게 홍보 전문가는 말한다. “램지가 미친듯이 포스팅을 하고 있어요. 이걸 언론사들이 공유하고 SNS에선 짤방으로 만들어 또 공유하고. 이 정도면 기록이에요.”
칼이 일종의 (meme·유행 요소를 모방 또는 재가공해 만든 콘텐츠)’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밈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처음 만든 용어로 최근 유통업계에서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밈노믹스(meme+economics)’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가수 비의 ‘1일 3깡’이 밈으로 소비되자 기업들이 앞다퉈 관련 홍보에 나선 게 대표적이다.
홍보 전문가는 칼에게 “요리검증 프로그램 MC 자리는 따놨다”고 위로하지만 칼은 그저 괴로울 뿐이다. 이 일로 레스토랑에서도 잘렸다. “지금 사람들이 절 비웃는 건가요, 아니면 공감하는 건가요.” “둘 다요.” 밈노믹스의 특징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인증샷 성지’ 된 푸드트럭

요리를 계속하고 싶었던 칼은 푸드트럭에 도전한다. 아내와의 이혼 후 멀어졌던 아들도 방학을 맞아 합류한다. 그렇게 팔기 시작한 메뉴는 쿠바 샌드위치. SNS에 익숙한 아들은 매일 푸드트럭의 영업 장소를 위치 태그를 걸어 알린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과정과 재료 사진도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램지와 싸우면서 얻은 2만 명의 팔로어가 칼에게 기회가 됐다. 칼의 푸드트럭은 SNS에서 ‘인증샷 성지’가 된다.

 

이렇게 누군가의 소비가 다른 사람의 소비를 부추기는 현상을 ‘밴드왜건 효과’라고 부른다. SNS 인증샷 열풍도 다른 사람의 소비를 따라하고 싶다는 심리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다. 칼의 푸드트럭은 ‘에펠탑 효과’까지 누린다. 자주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상품의 호감도가 상승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용어다. 칼과 아들은 몇 달간 함께 트럭을 타고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따뜻한 정을 나눈다.

아들이 선물한 ‘쇼트폼 콘텐츠’

아들은 요리사를 꿈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칼은 언제까지 아들이 자신과 함께 다니며 푸드트럭을 운영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방학이 끝나자 전 부인에게 다시 아들을 돌려보내려는 칼. 하지만 아들이 떠나기 전 선물로 보낸 ‘1초 동영상’이 칼의 마음을 돌린다. 낡은 트럭을 청소할 때부터 레시피를 고민하고, 함께 웃고 떠드는 모습까지 푸드트럭의 나날들을 매일 1초씩 찍어 이어붙인 것이다. 아들의 1초 동영상은 MZ세대(밀레니얼세대+Z세대)가 추구하는 ‘쇼트폼경제’를 보여준다. 5초에서 길게는 15분. 스마트폰을 이용해 틈틈이 즐길 수 있는 쇼트폼 콘텐츠가 산업 전반을 휩쓸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해 전체 국내 광고 중 50%가 1분 이하로 제작된 쇼트폼 영상이다. 긴 호흡보다는 짧고 명징한 메시지를 선호하는 MZ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것이다.
쇼트폼의 원조 격인 콘텐츠 서비스 ‘틱톡’은 현재 기업가치만 1000억달러로 추산(블룸버그 기준)된다. 유튜브는 쇼트폼 서비스인 ‘쇼츠’를 준비하고 있고, 모바일 쇼트폼업체인 ‘퀴지’는 드림웍스 창업자인 제프리 카젠버그 등으로부터 18억달러(약 2조2000억원)를 투자받았다. 1초 동영상에 감동한 칼은 아들에게 다시 손을 내민다. “푸드트럭 계속하자. 대신 학교 공부엔 피해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칼의 꿈은 이뤄진다

결말은 램지가 칼의 푸드트럭을 찾아오는 장면이다. 칼을 불러낸 램지는 사과 아닌 사과를 툭 던진다. “난 원래 그쪽 팬인데. 하지만 그 식당에서 냈던 요리는 정말 엉망이었잖아요.” 놀라는 칼을 향해 덧붙인다. “대기업에 내 블로그를 팔아 번 돈으로 땅 좀 샀어요. 식당 하나 해봐요. 메뉴는 마음대로 하고.”

 

램지가 칼의 음식에 투자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망설이는 칼에게 램지는 덧붙인다. “우리 화해한 사연도 이슈감이니 손님은 몰릴 거예요. 당신은 요리만 하면 돼요. 이번 샌드위치는 정말 맛있었거든 요.” SNS 때문에 직장을 잃고 힘들어했던 칼이 결국 SNS 덕에 인플루언서로 이름을 날리고,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결국엔 그토록 원했던 자신만의 식당을 갖는 데도 성공하게 된 셈이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