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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괴테 그 말처럼, 일흔도 흔들리죠

황태자의 사색 2020. 12. 1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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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괴테 그 말처럼, 일흔도 흔들리죠

[Weekend Interview] 괴테석학, 괴테마을을 결심하다…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 김유태 기자
  • 입력 : 2020.12.11 17:06:27 수정 : 2020.12.11 23: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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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를 그의 거처인 경기 여주시 강천면 걸은리 여백서원에서 최근 만났다.

 

독일문학 연구에 평생을 헌신한 전 교수는 현재 경기도 여주에 `괴테 마을`을 조성 중이다. [김유태 기자]

 

"서원지기 혼자 하다 보니 별명이 `3인분 노비`였는데, 요즘엔 `5인분 노비`가 됐다니까요. 하하."

세계적 학자는 한국에 여럿 있지만 독일 문호 괴테 권위자 중에선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69)가 손꼽힌다.

 

1996년 서울대에 부임한 그는 1885년 설립된 독일 괴테학회가 1910년부터 수여해온 `괴테 금메달`을 2011년 받으며

탁월한 성취를 인정받았다.

 

2016년 6월,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들을 정도로 전설로 남은 명강의 `독일명작의 이해`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정년

퇴임한 전 교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경기 여주시에 `여백(如白)서원`을 세우고 괴테 전집을 번역 중이라는 소식은 종종 들렸지만 최근 반가운 소식이

추가됐다.

 

`괴테 마을(Goethe-Dorf)` 조성에 시동을 건 것. 괴테 마을 건립 소식을 환영하듯 한독협회가 이미륵상을,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삼성행복대상을, 그리고 내년에는 독일 작센주 욀스니츠시에서 라이너 쿤체상을 전 교수에게

수여한다는 더 반가운 뉴스도 들려왔다.

 

활짝 웃으며 커피를 내리는 전 교수를 초겨울 여백서원 서재에서 만났다.

―한국 시골에 괴테 마을이라니,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란 사람은 계산이 도통 안 되는 사람인데, 최근 독지가께서 거액을 기부하시며 여백서원을 괴테 마을로

만들라고 당부하셨어요. 밤잠 설치며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시작된 일이에요.

―아기자기한 한옥이 멋집니다.

▷퇴직하고 오려고 2014년 이곳 서원을 세웠어요. 글을 쓸 방이 필요했습니다.

 

시의 정자라는 의미로 시정(詩亭)을 먼저 세웠고 서원 본관인 이곳 여백재(齋), 해외 학자 게스트하우스 우정(友亭),

예술가 갤러리이자 `스무 명을 위한 파우스트 극장`으로 명명한 예정(藝亭), 또 차고를 고쳐 어린이도서관을 만들기까지 17년 걸렸습니다.

 

괴테란 이름이 자석과 같아 서원에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주에 괴테의 흔적을 재현할 계획인가요.

▷바이마르 괴테 하우스, 프랑크푸르트 괴테 생가, 괴테가 설계한 벨베데레 정원까지 그의 흔적을 평생 따랐고

모았습니다.

 

나이 일흔에 이르니 이제 괴테의 전모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고 알맹이만 가려낼 안목이 생긴 것 같아요.

 

크게 지을 필요도 없어요. 에센스만 모으면 됩니다. 괴테가 살던 바이마르는 인구 6만명의 소도시이지만 세계적 문화

도시죠.

 

여주도 작은 도시이지만 세계적 도시로 성장하리라 확신해요. 동양의 괴테 마을인 거죠.

―여주시에 원래 연고가 있으셨나요.

▷민들레 꽃씨 떨어지듯 여주에 자리를 잡았어요. 사연이 깁니다.

 

처음엔 친구와 250만원씩 갹출해 근처 폐옥을 하나 구했어요. `개집만 한 크기에 소반 하나 놓을 크기면 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지금도 제 방은 2평도 안 되는 쪽방입니다(웃음).

―비용이 꽤 드셨겠습니다.

▷혼자 힘으로 못했죠. 농협에 적금 1만원짜리 20년 붓고, 돈 한 푼 없어 끙끙 대면서도 그걸 또 잊어버리는 사람이

저란 사람입니다(웃음).

 

낙성대 은천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여기를 짓기 시작했어요. 월급에 인세로 모자라 기부해주신 분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콩나물값 아껴 한 푼씩 모은 주부가 마을 지으라 하시고, 전날 잠깐 만난 농부 할아버지가 이튿날 아침 7시에

전화가 와서는 땅 보태시라 연락 주시고…. 많은 분들의 눈물과 땀으로 지은 곳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볼까요. 왜 괴테였나요.

▷괴테는 희곡 `파우스트`의 작가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문인(文人) 괴테는 그의 단면일 뿐입니다.

 

그는 현직 공국 재상인 당대 최고 정치가였고, 1400점의 그림을 남긴 화가였으며, 뉴턴의 광학이론에 맞서 색채를

연구했습니다.

 

식물 품종을 깊이 연구했고, 고전 건축 책임자였으며, 광물 1만8000종을 모은 학자였습니다.

 

괴테는 단지 독일의 한 작가로서만 기억돼선 안 되는 세계인이며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한 영감을 주는 인물입니다. 그 중심에 `파우스트`가 있고요.

 

전 교수가 40년 넘게 읽은 `파우스트` 독일어판. 너무 낡아 이제 붉은 끈으로 묶어뒀다.

 

―괴테 전집을 번역 중이시죠.

▷200년 전에 쓴 2만통의 괴테 편지 중 1만5000통이 이미 원본으로 독일 학계에 수거돼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 참 지독합니다. 그걸 어떻게 다 모았나 몰라…(웃음). 편지 가운데 1%를 골라 초벌 번역을 막 마쳤어요.

 

전집은 총 20권인데 18번 `사랑에게`, 19번 `친구에게`, 20번 `세상에게`입니다.

 

나머지 원고 초고도 5년 안에 끝낼 각오예요. 10년 잡았다가 출간까지 20년이 걸리면 제가 버틸 수 있을까 싶어서….

―그 방대한 분량을 혼자 번역하신다고요.

▷중국에선 괴테 전집 정본을 학계 120명이 나눠서 만들고 있어요. 국책 사업이에요.

 

남김 없이 번역하겠다는 건데 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극단적으로 은유하면 한 단어가 120가지로 번역된다는

의미잖아요.

 

혼자 하는 일은 너무 힘들지만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원래 전공은 파울 첼란 연구(1986년 서울대 독문과 박사 학위 논문 `파울 첼란의 시에 나타난 고통의 형상화`)셨죠.

▷까마득한 과거가 됐어요. 첼란은 고통 끝에 1970년 센강에 빠져 생을 끊습니다.

 

첼란을 공부할 때는 그 고통을 들여다보다가 센강에 같이 빠져버린 것만 같을 정도로 슬펐어요.

 

1990년대 초 괴테 자서전 번역 업무가 주어졌어요. 전기(傳記) 번역이었는데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글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 괴테의 시를 몽땅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평생에 걸쳐 썼지요.

▷20대에 시작해 60년에 걸쳐 `파우스트`를 쓰고 사망 직전 책을 봉인해 책장에 넣습니다.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로 잘 알려진 `파우스트`의 유명한 문장을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로

수정하셨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문이죠. 지향이 있다면 방황하지 않아야 하고, 방황한다는 건 지향이 없어야 하는데,

상호 모순되니까요.

 

하지만 저 문장이 괴테가 파악한 진짜 인간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인간은 의식하든 안 하든 마음에 솟구치는 것이 있고 그러므로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죠.

―아끼는 또 다른 문장이 있으신가요.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역시 비문이죠.

 

선한 사람과 어두운 충동은 양립할 수 없고, 또 문제적 인간이 바른 길을 의식한다는 판단도 이상하니까요.

 

번역의 매끄러움보다는 인간을 정확히 바라보려는 문장입니다.

―2011년 괴테 금메달 수상 당시로 돌아가 볼까요. 테렌스 제임스 리드 옥스퍼드대 교수의 시상식 축사는 한 인간의

여정을 향한 압도적인 찬사였습니다.

 

"프라우 전(전 교수)이 번역한 작품들의 풍부한 양과 폭을 상상하자면, 그것은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입니다. 놀라서 자문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하루가 몇 시간인가 하고요."

▷한 사람의 서재는 하나의 도서관이지만 진정 빛나는 도서관은 책을 읽은 독자의 정신 그 자체입니다.

 

전 언제나 연구의 보답을 과하게 받았습니다. 문학의 언어는 모든 언어 중 가장 공들인 언어이고, 문학을 공부한다는 건 인간의 최고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잠시 시선을 돌려 볼까요. 창밖 안뜰에 나무가 아름답습니다. 저곳 별칭이 `나무 고아원`이라고요.

▷예전에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리던, 서울대 본부와 중앙도서관 사이 계단 콘크리트 틈에서 느티나무 싹이 텄어요.

그 녀석이 구출 1호였습니다. 회초리 같던 묘목들을 옮겨 심으니 2m 넘게 자라기도 했어요.

 

이곳 나무는 전부 고아입니다. 자랄 수 없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을 하나씩 서원에 옮겨 심었어요. 아, 입양도

가능해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일단 오셔서 `찜`만 하시면 됩니다(웃음).

 

전 교수의 책상. 오른쪽의 거대한 서적은 독일어 사전으로, 1980년 동독 시절 베를린 소재 아카데미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이다. 전 교수는 "독일이 사회주의 경험 때문인지 사전은 정말 끝내주게 만든다"며 웃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인가요.

▷그럼요. 일반 공개일은 정확히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입니다. 5월과 10월에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글도 읽고

강연도 해요.

`오마토`(5월의 마지막 토요일), `시마토`(10월의 마지막 토요일)라고 부르는데 정말 많은 분이 오셔서 알아서 먹고

주무시고 가세요.

 

`독일명작의 이해` 수강했던 학생들이 많이 오지만 사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분들이에요.

 

누구든 환영입니다. 어떤 분들은 금요일에 오셔서 화요일까지 집에 가질 않아요. 자기들끼리 아주 눌러앉기도 하고…(웃음).

―독일문학 연구에 여백서원 건립, 이제는 괴테 마을까지…. 힘드셨겠어요.

▷냉정하게 생각하면 연구 자체가 힘들진 않았어요. 힘든 건 사람이죠. 그때 생각이 나네요

 

한때는 연구실에 중앙난방이 안 돼서 난로 하나 켜고 공부하느라 집에 못 가던 때가 있었어요. 곁불을 쬐며 책 보는데

무슨 냄새가 나서 보니 뜨거워서 물집이 잔뜩이더라구요(웃음).

 

참 바보에 멍텅구리로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힘들다고 절망하진 않았지만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지금도 방황 중이십니까.

▷그럼요. 보이지 않나요? 저 지금도 헤매고 있잖아요(웃음). 삶의 매 순간이 방황이었고 번민이었습니다.

 

지금처럼요. 사실 나이가 있으니 이제는 언제 `회수`당해도 불만이 없는 몸이에요. 몸에 들인 공이 있으면 떠나기 아깝겠는데, 정말 들인 공이 몸에게 미안할 정도로 없거든요. 회수당하는 건 불만이 없지만 괴테 전집도 괴테 마을도 계획한 대로 마무리하고 가고 싶어요. 공부한 거 꽁꽁 싸매고 가서 뭐하겠어요. 배운 거 전부 잘 정리해서 놔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에요.

 



▶▶ 전영애 교수는…

△1951년 경북 영주 출생 △1973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85년 서울대 독문과 박사 취득 △1985년 경원대 독문과 부교수 △1996년 서울대 독문과 교수 △2001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초빙교원 △2006년 한국괴테학회장 △200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2008년 독일 뮌헨대 강사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수여 괴테 금메달 △2011년 서울대 교육상 △2011년 한국문학번역원 이사 △2014년 여백서원 건립 △2016년 서울대 정년 퇴임 △2020년 삼성행복대상 △2020년 이미륵상 △2021년 라이너 쿤체상(예정) △`괴테 시 전집`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 `파우스트 I·II` `괴테 서·동 시집`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등 60여 권 번역 및 소개

[여주 =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