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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 민주주의 가치를 심어주세요

황태자의 사색 2022. 1. 1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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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 민주주의 가치를 심어주세요

정치디자인으로 괜찮은
민주주의를 만들수 없다
민주주의는 문서가 아니라
가치의 실천으로 굳어진다

  • 입력 : 2022.01.19 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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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에피소드에 백악관을 예방한 벨라루스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이들은 현자인 지도자가 무소불위 권력으로 국민 통합을 주도하는 미국 대통령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반면 백악관 공보국장은 단일 집행부의 독재 역사를 지닌 신흥국가에 적합한 통치 체제로서 민의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의원내각제를 옹호한다.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에 한 명의 현자만으로 역부족이며, 건국 시조가 만들어낸 미국 대통령제의 장수는 순전히 운이 좋은 탓이라고 에두른다. 그리고 전 세계에 수출한 가장 위험한 상품이 바로 미국 대통령제라며 열변을 토한다.

작년 이맘때 그 가장 위험한 대통령제가 탄생한 미국에서는 대선 결과에 승복하길 거부하는 전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이 대선 결과를 공표하려는 의사당 건물에 난입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도널드 트럼프 전임 대통령은 임기 중과 퇴임 직전에 재차 탄핵소추로 '불명예' 전당에 올랐다. 이후 사상자가 발생한 폭력 사태에 대한 여죄를 묻는 사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비록 의사당 내부에 있지 않았으나 지지자들에게 의사당 건물 난입을 종용한 전임 대통령의 책임을 추궁하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2020년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공화당 지지층 절대다수를 포함해 미국 유권자 3분의 1이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의 신념을 근거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니 심히 우려스럽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필수요건인 선거절차를 바꾸려는 법제화가 여러 주에서 실현되는 판국이다. '트럼피즘' 지지자들은 폭력 행사만으로 선거 결과를 번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특정 계층의 선거 참여에 대한 원천 봉쇄로 반격을 가하고 있다.

헌법에 근거한 연방주의 원칙을 공격적으로 활용해 연방정부 선거 관리 권한을 보유한 주 차원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 요건 제한 및 사전투표나 우편투표 등 일부 기표 방식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이러한 일련의 선제적 조치는 세습 군주가 아닌 민선 대통령을 연방주의에 포갠 건국 시조의 원래 취지를 교묘하고 정교하게 악용한 결과다. 다만 이 법안을 연방 차원에서 무효화시키려는 시도는 연방헌법에 기초한 주권재민과 자치 원칙을 위배하는 패러독스를 내포한다.

설령 민주당과 공화당이 절반씩 의석을 점유한 상원에서 연방 차원의 선거 관리 규제 법안이 통과돼도, 위헌 여부를 유권해석하는 연방대법원에는 연방정부의 권한 비대에 관해 회의적인 법관이 다수를 차지한다. 대통령 임기 중 종신직 연방대법원 법관 공석으로 인해 그 후보를 지명하는 기회가 많지 않은데, 단임을 한 트럼프 전임 대통령은 두 명이나 교체한 '행운아'인 탓이다.

2013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새로운 선거권법의 법제화를 관철하기 위해 상원 의사진행방해 절차를 개정하려던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같은 정당의 키어스틴 시너마 상원의원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애리조나주 민주당 지지자들이 케케묵은 절차 자체보다 진정한 민주주의 가치 수호가 더 중요하다며 반발했다.

미국 드라마에서 헌법학 교수는 벨라루스 정치인들에 실망한 백악관 공보국장에게 헌법이 천명하는 권력 구조는 문서로서의 명문화는 시작에 불과하며 심의와 토론을 거쳐 민주주의 가치가 심어질 수 있는 시민의식을 일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그만큼 엘리트 역할도 커지기 마련이다.

"디자인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이 생성된다." 산업 디자이너 야나기 소리(柳宗理)를 김진우(2021)가 인용했는데, 선거를 치르는 모든 민주주의 체제에도 적용된다. 정치 디자인으로 민주주의를 양산해 내려는 정치공학과 기능주의, 때로는 포퓰리즘 유혹 너머 민주주의 가치를 심는 과정에서 정치 디자인이 생성된다.

[이옥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