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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대화는 자동 녹음 중"…'녹취 공포' 닥쳤다

황태자의 사색 2022. 2. 11.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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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대화는 자동 녹음 중"…'녹취 공포' 닥쳤다

 
 
입력 2022.02.11 17:25 수정 2022.02.11 19:13 지면 A1
녹취의 일상화…불신사회 조장

통화 자동녹음 가능한 스마트폰 4000만대 달해
무분별한 사생활 폭로 vs 최소한의 방어 수단
이번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대선 후보는 물론이고 연관 인물들의 사적 대화 녹음이 잇달아 공개된 게 ‘핫이슈’로
떠올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부인 김혜경 씨의 욕설이 담긴 통화녹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부인 김건희 씨의 기자와의 통화 내용이 큰 화제를 모았다.
 
경기 성남시 대장동 특혜 개발 의혹과 관련해서도 정영학 회계사, 김만배 화천대유 대주주 등 간에 오간 대화의
녹취록이 ‘스모킹건(결정적 단서)’으로 떠올랐다.
이처럼 거센 사회적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녹음 내용 유출의 배경에는 누구나 쉽게 대화를 녹음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이 자리잡고 있다.
 
자동으로 통화녹음이 되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스마트폰 가입자는 국내 시장의 80%(4000만 명 이상)를 차지한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 녹음된 내용을 자동으로 텍스트로 바꿔주는 STT(speech to text) 기술이 더해져 누구나 쉽게
녹취록을 작성할 수 있는 여건까지 마련됐다.

‘녹취의 일상화’는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에선 통화녹음이 “나를 보호할 최소한의 방어
도구”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편에선 “자유롭게 대화하기 어려운 불신의 시대가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리적 문제를 배제한 채 법적 관점에서만 보면 통화녹음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녹음한 사람이 대화 참여자라면 상대방 의사와 상관없이 녹음해도 문제가 없다.
법적 증거로도 활용할 수 있다.

 

 

 

 

2017년엔 통화녹음이 개인정보 침해 소지가 있다는 비판이 일각에서 제기돼 통화 중 녹음 사실이 상대방에게
알려지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된 적이 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을 넘지 못해 법 제정은 무산됐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녹취의 일상화는 한국이
‘불신사회’가 돼 가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사람 간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상대방이 나를 존중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지고 그 결과 대화를 녹음해 증거로 보전하는 행태가 당연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갑질·폭언서 날 지키려 녹음" vs "불신사회 조장, 누굴 믿겠나"
'몰래 녹음' 놓고 커지는 논란
 
회사원 표지훈 씨(31)는 부서 회의 때 녹음 기능을 즐겨 사용한다.
 
회의 내용을 정리할 때 아무리 빠르게 타이핑을 해도 놓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네이버의 클로바노트처럼 음성 파일을 텍스트로 바꿔주는 서비스를 활용하기도 한다.

간호사 김모씨(27)는 출근할 때 항상 주머니에 USB 모양의 초소형 녹음기를 챙긴다.
 
환자의 폭언, 성희롱이나 선배 간호사의 ‘태움’(괴롭힘) 등이 발생하면 녹음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혹시 몰라 녹음하는 습관을 들였다”며 “동료 간호사 중에도 사원증, 팔찌, 펜 모양 녹음기로 평소 녹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전했다.

 

 

AI가 녹음 내용 문자로 전환까지
 
지금 대한민국은 ‘녹취 전성시대’다. 스마트폰이나 초소형 녹음기를 활용해 통화·대화를 녹음하는 게 일상화했다.
 
최근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본인, 혹은 배우자의 대화 녹음 때문에 곤욕을
치른 건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국내 스마트폰 시장의 80%가량을 차지하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상대방 모르게 언제든 통화를 녹음할 수 있다.
 
한번 설정해두면 이후에는 자동으로 모든 통화 내용이 휴대폰에 저장되기 때문에 계속 사용하는 이용자가 대부분이다.
 
SK텔레콤은 통화 내용을 인공지능(AI)이 인식해 텍스트로 바꿔주는 서비스도 선보였다.
 
애플 아이폰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통화 녹음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다.
 
‘몰래 녹음’을 위해 볼펜, 시계, 단추, 벨트 등의 형태로 제작된 초소형 녹음기가 있다. 목걸이형 사원증과 똑같이 생긴
녹음기도 출시됐다.

 

거세지는 사회적 논란
 
통화나 대화를 녹음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자기방어’를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계약을 체결할 때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증거를 남긴다는 것이다.
지난 5일에는 구독자 80만 명의 유명 게임 유튜버 ‘개리형’(본명 김춘수)이 편집자들에게 언어폭력과 갑질을 행사한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폭로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녹음 파일로 강간 혐의를 벗은 남성도 있다. 채팅앱을 통해 40대 여성 A씨와 2020년 7월 경기 화성에서 만난 B씨는
성관계 후 A씨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A씨는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했지만 B씨가 성관계 당일 녹취한 음성 파일을 제출해 강간 혐의를 벗었다.
 
A씨는 지난달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부장판사 홍창우)으로부터 무고 혐의로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문제는 원치 않는 녹음으로 인한 피해나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녹음은 영상보다 짜깁기가 쉬워 일단 공개되면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다.

중학교 교사 정모씨(27)는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많아지면서 수업을 녹화·녹음하는 학생이 많다”며 “말의 전체적인 맥락과 상관없이 일부분만 왜곡돼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일부 학교에선 학생, 심지어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교사의 외모나 말투를 품평하는 일이 벌어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만연한 불신이 ‘녹취공화국’ 만들어
 
전문가들은 사회적으로 만연한 불신과 불안감을 녹음의 주된 이유로 꼽았다.
 
‘언제든 상대방의 말이나 태도가 돌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다는 얘기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병리적 현상”이라며 “사람들이 언제든 자신에게 부당한 일이 생길 수 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 동의 없는 녹음이 법적으로 허용돼 크게 거부감이 없지만,
개인정보 보호 원칙을 존중하는 선에서 지침 마련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콜센터 등에서 통화를 녹음 중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녹음이 꼭 필요하다면 사전에 상대방에게 고지하는 방식 등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최예린/이광식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