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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중년 남자] 간단히 먹자고 하지 말라… 간단히 되는 음식은 없다

황태자의 사색 2022. 2. 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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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하는 중년 남자] 간단히 먹자고 하지 말라… 간단히 되는 음식은 없다

입력 2022.02.12 03:00
 
 
 
 
 

주말 점심에 국수를 먹고 싶다고 해서 “간단히 국수나 먹지?”라고 말하고 싶다면 숨을 한 번 깊게 쉬고 다르게 말하는 것이 현명하다. 국수는 결코 간단한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직장생활 하면서 매식이 잦은 남편들이 이런 말 실수를 자주 한다. 간단히 먹는다는 건 말 그대로 먹기 간단하다는 것이지 만들기도 간단하다는 뜻은 아니다. 점심을 김밥으로 간단히 때울 수는 있어도 김밥을 만들어 먹으려면 삼겹살 굽고 김치찌개에 밥까지 먹는 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잔치국수

잔치국수로 예를 들어보자. 그 만들기 쉽다는 백종원 잔치국수조차 애호박·표고버섯·당근·달걀이 있어야 하고 양념장 만드는 데만 대파·청양고추·마늘·고춧가루·참기름·깨소금 등등이 필요하다. 정통 잔치국수라면 육수를 따로 끓이고 달걀 지단도 부쳐야 한다. 음식 블로거들은 “휘리릭 만들어 호로록 먹는다”고 하는데, 호로록 먹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휘리릭 만드는 건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다.

밥을 하는 입장에서는 주말 점심에 간단히 국수나 해먹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간단히’에는 여러 가지 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마침 끓여 놓은 육수가 좀 남아있고 냉장고에 오늘 해치워야 할 버섯과 애호박이 있는 상태다. 남은 소면을 마저 먹고 이따가 시장에 가서 한 봉지 새로 사다 놓아야 할 것 같다. 마트에서 파는 것 말고 시장에 가니까 소면을 직접 뽑아 파는 가게가 있던데 이번엔 그걸 한번 사먹어봐야겠어. 이렇게 국수 메뉴와 함께 오후 계획이 잡힌다. 그래, 점심엔 간단히 국수나 끓여 먹자, 고 생각하는 순간 남편이 말한다. 간단히 국수나 먹지.

 

갑자기 국수가 꼴도 보기 싫어진다.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국수는 어떤 계획에 포함된 중요한 단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말하는 국수는 ‘대충 때우는 별미’ 같은 것이다. 심지어 ‘간단히’라고 말함으로써 밥 하는 사람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선심마저 쓰고 있다. 그냥 국수 먹자고 했으면 빙고, 그렇잖아도 국수 끓일까 했는데 하면서 맞장구를 쳐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의 ‘간단히’에 심사가 뒤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식빵에 잼 발라 먹거나 누룽지 끓여 김치 반찬 놓고 먹을 생각 아니라면 간단히 먹자고 하는 게 아니다. 집밥 메뉴 가운데 간단히 되는 것은 없다. 냉장고 사정에 통달하고 그 메뉴에 정통한 사람만이 간단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정 간단히 먹고 싶으면 나가서 사먹으면 된다. 사먹으면 모든 음식이 아주 간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