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헌옷·전구의 기묘한 조합…삶의 자리에 죽음을 소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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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탕스키의‘아니미타스’가 상영되고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장. 맑은 풍경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있다. 이은주 기자
미술 애호가로 소문난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최근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아 전시를 관람하고 소셜미디어에 인증사진을 올렸다. RM이 본 전시는 프랑스 현대미술 거장 크리스티앙 볼탕스키(1944~2021)의 대규모 회고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4.4’다. RM은 ‘기념비’ ‘코트’ ‘저장소:카나다’ ‘유령의 복도’ 등의 작품을 지켜보는 자신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 4장을 공개했다.
볼탕스키 전시는 지난해 10월 개막한 이래 미술 전문가 사이에서 ‘꼭 봐야 할 전시’로 꼽혔다. 요즘도 전국 미술관 학예사를 비롯해 입소문으로 알게 된 관람객들이 전시를 보려고 끊임없이 부산을 찾는다. 미술관 본관 3층과 이우환 공간 1층에서 모두 43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첫 유작전이라는 점에서도 화제다.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해 7월 14일 작가가 돌연 작고하면서 전시는 대규모 회고전인 동시에 유작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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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으로 완성한 설치작품 ‘저장소 : 카나다’. 이은주 기자
볼탕스키는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사진과 설치미술, 사운드, 조명 등으로 집단의 역사와 기억, 애도와 추모 등을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작가는 지난해 3~4월 미술관 측과 연락하며 출품작을 골랐고, 10여 차례 영상회의를 통해 전시공간 구성과 디자인까지 결정했다. 그러다가 미술관 측에 “병원에 간다”고 알려왔는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뤄온 작가가 직접 지은 전시 제목 ‘4.4’도 눈길을 끈다. ‘4.4’는 그가 태어난 해인 ‘1944년’을 뜻하는 동시에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눌 때 ‘생의 마지막 단계’라는 뜻이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공들인 이 전시가 그의 예술 여정을 마무리하는 마침표가 됐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해 작가의 부고 기사에서 “1944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mortality)은 볼탕스키의 특별한 주제였다”고 썼다. 독일군의 파리 점령 당시 유대인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1년 반 동안 자신의 아파트 바닥 아래에서 숨어 지내며 목숨을 부지했다. 볼탕스키는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모가 겪은 반유대주의는 그에게도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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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연작 중 하나. 1986년. 금속 프레임, 전구, 80x118㎝. [사진 부산시립미술관]
볼탕스키는 일찍이 벼룩시장에 나온 다른 가족의 앨범 사진이나 신문에 난 인물사진을 모아 조합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수집한 사진에 특별한 서사를 부여하지 않았다. 익명의 다양한 얼굴 사진은 그 자체로 홀로코스트, 곧 죽음을 연상케 했다. 이후 사진, 양철, 옷, 전구 등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해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 기억과 망각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작도 모두 그런 맥락 위에 있다. 예를 들면 전시장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작품이 볼탕스키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기념비(Monument)’ 연작이다. 작가는 액자에 담긴 아이들 얼굴 사진, 녹슨 과자 상자와 작은 백열등을 결합해 성당의 제단 같은 작품을 연출했다. 아이들 사진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작가가 다양한 경로로 수집한 사진이다.
거대한 벽면을 빽빽하게 옷으로 뒤덮고 전구를 밝힌 ‘저장소:카나다(Réserve Canada)’는 유대인 학살과 관계가 깊다. ‘카나다’는 억류된 유대인의 개인 소지품을 남겨 둔 창고에 나치가 붙인 이름으로, 볼탕스키는 1988년 캐나다 토론토 전시에서 이 작품을 처음 선보였다. 이후 발표한 산 모양의 검은 옷더미 작품 ‘탄광’은 아예 하나의 무덤을 연상시킨다.
영상 작업도 남다르다. 러닝타임이 13시간에 달하는 ’아니미타스‘ 화면엔 사막 들판의 마른 풀 같은 줄기에 달린 수백 개의 방울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과 소리만 담겼다. 촬영 장소는 칠레의 아카타마 사막으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치하에서 살해된 수천 명이 묻힌 곳이다.
전시는 볼탕스키라는 작가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얼마나 집요하게 활용했는지 보여준다.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진’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희미한 사진, 이를 촛불처럼 밝히는 전구와 녹슨 상자는 보는 이에게 애틋함과 서글픔, 공포감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일찍이 작품에 옷과 전구, 녹슨 주석 박스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쓴 점도 눈에 띈다. 예술을 시각적 아름다움과 시장 가치로만 보는 전통적인 관념에 맞선 작업으로 읽힌다.
양은진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는 “볼탕스키는 장르와 장르를 결합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라며 “사진과 오브제, 오브제와 영상을 결합한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죽음을 성찰했다”고 말했다.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은 “볼탕스키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전시가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성사될 수 있었다”며 “볼탕스키가 마지막 예술혼이 깃든 특별한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3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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