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치 보복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나는 정치 보복을 경험해봤다. … 적폐 청산이 혹시라도 정치 보복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우려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겠다. 그런데 개별 비리들이 불거져 나오는데 수사를 막을 수는 없다. 내가 주장하는 적폐 청산은 개인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불공정 특권 구조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초인 2017년 9월 청와대에서 연 여야 4당 대표 회동에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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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집권하면 문재인 정부처럼 전 정부에 대한 적폐 청산 수사를 하겠느냐”는 질문에 “해야죠. (수사가) 돼야죠”라고 답했다. 적폐 청산에 대해 윤 후보가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발언과 똑같이 말했다면 문 대통령은 분노하지도,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았을까?
적폐 청산에 대한 문재인의 생각은 2017년 1월에 출간한 ‘대한민국이 묻는다’에 잘 나와 있다. 문재인은 대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형사 책임을 져야죠. 공범 관계에 있는 김기춘, 우병우도 당연히 형사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고 부화뇌동했던 공직자들이나 전문가들도 법적 책임을 지든 역사적 심판을 받든 해야죠”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이번 적폐 수사 발언에 대한 문 대통령의 격앙된 반응을 접한 윤석열은 “윤석열의 사전에 정치 보복이라는 단어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늘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 없는 사정을 강조해오셨다. 저도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해서는 늘 법과 원칙, 공정한 시스템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려왔다”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이 그랬듯 윤석열도 말이 그런 것이지 뜻이 그런 건 아니다.
만약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럴듯한 새로운 이름으로 포장되긴 하겠지만) 단언컨대 문재인 정권 청산은 피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정통성’에 자신 있는 모든 문민 대통령은 ‘청산’에 집착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 청산’, 김대중 대통령은 ‘보수 청산’, 노무현 대통령은 ‘기득권 청산’, 이명박 대통령은 ‘좌파 청산’, 박근혜 대통령은 ‘종북 청산’,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 청산’. 과거 정권 청산은 한국 정치의 DNA다.
문민 정권이 청산에 집착한 것은 ‘국민이 직접 뽑은’ 정통성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강제로 이식할 권리까지 담보해 준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 오만이 비극을 반복 재생한다. 반면 군사 쿠데타 주역이자 36.6%라는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정통성 콤플렉스 탓에 역설적으로 정체성을 뛰어넘는 3당 합당을 결단할 수 있었다. 그는 넓고 강한 ‘통치 연합’ 덕에 역사적으로 재평가받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위대한 유산을 남길 역사적 기회가 있었다. 국민 80% 이상이 탄핵을 지지하고, 국회의원 234명이 탄핵에 찬성한 덕에 탄생한 정부라면 마땅히 탄핵 연대를 ‘개혁 연대’로 발전시켜 개헌을 통한 ‘2017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처 외삼촌 묘 벌초하듯’ 개헌 시늉만 했다. 문재인 정권은 대한민국 리빌딩 기회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탄핵의 주체가 자신들뿐이라는 오만에 빠진 문재인 정권은 민주당의 미래도 걷어차 버렸다. 2017년 탄핵 이후 ‘보수 동맹’에서 이탈한 중도 보수를 ‘진보 동맹’으로 편입시킬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기회를 살렸다면 민주당은 ‘주류 교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했을 것이다. 방황하던 중도 보수는 민주당이 ‘강성 친문 정체성’에 갇혀 정치적 자폐 증상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보수 동맹으로 되돌아갔다.
정치는 단순하다. 지지 기반을 넓히면 살고 좁히면 죽는다. 지난 30년간 연합한 정치 세력은 승리했고 분열한 세력은 패배했다. 예외가 없다. 2017년 탄핵 이후 중도 보수의 이탈로 한국 정치의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한 ‘보수 동맹’은 중도 보수의 회귀로 전력의 90%를 회복한 반면 ‘진보 동맹’은 ‘2030 MZ세대’를 잃고 전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정권의 몰락은 외부 공격이 아니라 승리를 가져다 준 ‘선거 연합’이 내부 분열로 붕괴하면서 시작됐다. 김영삼 정권은 JP 축출과 전두환·노태우 구속으로 3당 합당 구조가 해체되면서, 김대중 정권은 ‘DJP 연합’이 깨지면서, 노무현 정권은 호남 기반의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이명박 정권은 2008년 총선 직전 박근혜가 “국민도 속고 저도 속았습니다”라고 말한 순간, 박근혜 정권은 2015년 당 지도부와 충돌하면서 몰락했다. 문재인 정권은 든든한 동맹군 2030세대를 잃고 서서히 가라앉는 중이다.
2017년과 비교해보면 진보 동맹은 2030을 잃은 상태에서 느닷없는 문재인 대통령의 참전으로 ‘문재인 정권 시즌2′를 우려하는 중도를 우군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채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다. 현재 대선 판세는 ‘적어도 유리하지는 않은’ 이재명과 ‘적어도 불리하지는 않은’ 윤석열의 박빙 형세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의 ‘정치 보복’ 프레임은 중도층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문재인 정권의 위선은 정치 분석가 윤태곤의 예리한 지적처럼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전직 대통령이 소비되는 방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전에는 민주당이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국민의힘이 “김대중과 노무현은 이러지 않았다”고 비판하면 민주당은 “이명박과 박근혜도 그랬다”고 반박한다. ‘촛불 정권’의 기준이 촛불로 탄핵당한 박근혜 정권으로 내려왔다.
문재인 정권 초에는 태극기 세력이 “문재인도 퇴임 후에 감옥 갈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민주당이 “문재인 대통령의 퇴임 후 안전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과연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자기들이 높여 놓은 허들을 넘을 수 있을까. 아니면 스스로 낮춘 기준인 이명박·박근혜의 뒤를 따르게 될까.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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