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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여성이 한글로 기록한 조리서가 있습니다. 양반가에서 먹는 다양한 음식의 조리법을 자세히 기록해 가치도 매우 높습니다. 바로 장계향이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음식의 맛을 내는 비방)입니다.
○여성 성리학자가 쓴 조리서
장계향(1598∼1680)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성리학자입니다. 남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여성 성인을 꿈꾸고, 평생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성리학 연구에 힘쓴 여성 학자, 10명의 자녀를 바르고 어질게 양육한 어머니, 재주보다 선행을 강조한 교육자, 병자호란 중 어려운 백성을 구휼한 사회사업가, 10여 편의 뛰어난 시를 남긴 시인, 당대 학자들이 감탄한 초서체의 대가 등으로도 불립니다.장계향의 아버지 장흥효(1564∼1634)는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 류성룡 등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장흥효는 자신의 학문 세계를 딸 장계향에게 전수하였고, 장계향은 13세에 ‘성인음’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습니다. “성인이 살던 시절에 태어나지 못해/성인의 얼굴 뵙지 못했어도/(경전을 통해)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성인의 마음 쓰심을 넉넉히 알리”라고 썼습니다. 13세의 어린 소녀가 당당히 성인의 삶, 군자의 삶을 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옛 음식 문화 엿보이는 음식디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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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은 조리 재료에 따라 조리 항목을 면병류(면 요리와 떡), 어육류, 채소류, 주류(술) 등으로 나누고, 해당 항목의 조리 품목을 한 가지씩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육류의 경우 어전법(생선으로 전을 만드는 법), 어만두법(생선으로 만두를 만드는 법), 해삼 다루는 법 등의 순서로 조리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은 한문 조리서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조리 용어 대신 일상적이고 쉬운 언어로 조리과정을 설명했습니다. 한문 조리서에서 사용하는 진말(眞末), 점미(粘米) 등의 식품 이름을 밀가루, 찹쌀 등으로, 박할(薄割) 등 조리 용어를 얇게 썰다 등으로 한글화하였습니다. 우리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는 ‘섞다, 끊이다, 삶다, 잘게 다지다, 송송 썰다’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또,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와 조미료의 양, 길이, 크기 등의 표현도 일상적이고 쉬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음식디미방은 다양한 종류의 발효식품, 특이한 음식 재료와 조리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쌀, 찹쌀 등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만드는 ‘순향주법’을 비롯하여 약 51종의 전통주 제조법을 기록하였습니다. 전체 146항목 중에서 술 만드는 법이 51항목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상류층 가정 주부가 하는 일 중에서 술 빚기와 손님 접대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음식 재료와 조리 방법에는 상화법, 웅장, 꿩김치법, 꿩짠지, 꿩지히 등이 눈길을 끕니다. 상화법은 밀가루와 밀기울에 누룩과 술을 섞어 부풀린 다음 찌는 요리 방법이고, 웅장은 곰 발바닥을 음식 재료로 굽는 조리 방법입니다. 꿩김치법, 꿩짠지, 꿩지히는 모두 꿩고기와 오이지를 재료로 함께 섞어 삭히거나 볶는 조리 방법입니다. 당시에는 농사에 소가 귀하게 쓰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꿩이 소고기를 대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음식디미방에는 우리 음식의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옛날과 오늘의 음식문화를 비교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사라져버릴 뻔한 전통 조리법을 발굴할 수 있는 지침서로서도 그 가치가 높습니다.
이환병 고척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