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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 예감한 진정한 진보주의자, 천국에서 잠시 쉬세요

황태자의 사색 2022. 2. 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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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 예감한 진정한 진보주의자, 천국에서 잠시 쉬세요

중앙일보

입력 2022.02.28 00:02

업데이트 2022.02.2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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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김주연 ‘이어령을 추모하며’

이어령, 그는 문화의 자부심이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문화라는 영역에 영예를 입혀준, 말의 정확한 뜻에서, 과감한 크리에이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내가 아는 진정한 진보주의자였다. ‘진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다소 폭넓게 쓰이는 것 같은데, 이어령이야말로 참다운 진보 그 자체였다. 그는 매일 새로운 말을 한다. 이미 있는 말도 그 의미를 뒤집고 작은 한 조각의 말마디에서 거대한 해석을 이끌어낸다. 그의 문화는 그렇게 진보적 형성을 이루어 가면서 정치나 경제에 종속된, 혹은 그 하위 영향권에 머무르는 자리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강력한 힘임을 끊임없이 발주시켜왔다. 이어령, 그의 이름은 그 자체로 한국의 독자적인 명예요 브랜드였다. 예컨대 그는 정치, 혹은 현실의 여러 가지 부끄러운 아이콘을 지워 버리는 흔쾌한 자부심이었다. 따라서 그의 생각에 동의하든 안 하든, 심지어는 그 내용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이어령을 말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문화행위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갔다. 허전하다.

‘말’이 천대받는 사회에서 이어령은 ‘말’을 살려준,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말’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엄중한 사회라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준 고마운 선생이었다. 그가 고안해서 선포한 ‘디지로그’라는 ‘말’을 보라.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복합된 새로운 그 ‘말’ 속에는 아날로그의 전통정서와 디지털의 미래전망이 어우러진 현실이 움직인다. 근대 초기의 미분화된 취락정서와 근대를 넘어서는 기술지향을 단번에 껴안는 놀라운 예지와 문학적 감각이 번득이지 않는가. 죽음을 바라보면서 자궁과 무덤의 영어 어휘의 공통성을 발견하고 이를 생명 자본론과 연결시키는 안목은 단순한 어휘론을 넘어서는 문명비평가로서의 혜안이라고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의 수사는 화려한 문장가라는 호칭에 충분히 값하지만 불세출의 에세이들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의 깊이는 늘 이 시대를 앞질러 예감하여 왔다.

이어령은 그 문장과 비판의 예리함, 무엇보다 우상 파괴의 진보성으로 인하여 사람 자신마저 날카로운 인상으로 예단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의 인간성은 따뜻했다.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지 않는 습관도 (아마 한 시간은 기본일 듯) 한몫하겠지만 그는 뜻밖에도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문학은 권력과 정치이념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이라고 믿는 탓인지 바로 그 권력과 이념의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다. 그와 불온성 논쟁을 벌였던 김수영 시인을 향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곤경을 겪는 작가들을 말없이, 혹은 공개적으로 적극 변호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는 비슷한 일화들을 내게 말하면서 대부분 말없이 지나갔다고 조금 쓸쓸해 했다. 앞을 달리는 자의 외로움이라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품이 넉넉해 보이곤 했다

이어령, 그는 문학평론가였지만 문학평론에 배타적으로 집중하지는 않았다. 시, 소설, 드라마 등 문학의 모든 장르에 창작의 손길을 뻗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미시적/분석적 형태로 작품론/작가론에 머무르는 대신 그 전체를 아우르고 넘어서는 거시적 문명비평의 길로 나아갔으며 우리 사회 전체의 문화적 품격을 일으켜 세웠다.  미시적 감성을 통하여 거시적 세계를 움직인, 과감한 이 시대의 크리에이터는 그 모든 창작활동이 신이 준 선물이었다고 겸양까지 하였다! 시대의 비평가 이어령 선생, 참으로 이 세상의 큰 동력 자체였다, 천국에서 잠시 쉬시기 바랍니다.

김주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