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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R&D 성공률이 99%? 실패할 자유를 허하라

황태자의 사색 2022. 2. 2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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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R&D 성공률이 99%? 실패할 자유를 허하라

중앙일보

입력 2022.02.2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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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무버’로 가는 길

노준용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실패연구소장

우리나라는 눈부신 성장을 해왔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후, 앞만 보며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를 넘기며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에 들어섰다. 한국의 달라진 위상은 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 2020년, 2021년 두 차례 연속 초대된 사례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최근 우리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회원 그룹에서 선진국 회원 그룹으로 격상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국민 개개인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 사회가 지금껏 추구해온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모델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도 창업 80%는 실패
성공 예정된 연구로는 미래 없어
두려움 없는 도전이 창조의 원천
현실과 안 맞는 규정도 손질해야

 

더는 통하지 않는 ‘패스트 팔로어’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화성 탐사선 스타십의 시제품인 ‘SN9’이 지난해 2월 미국 텍사스주 보카치카에서 발사 후 폭발했다. 스페이스X의 로켓 개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로이터=연합뉴스]

현재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방식을 보자. 반도체·인공지능·전기차·드론·메타버스·우주발사체 등 기술개발의 거의 모든 동력이 ‘선진국이 하고 있으니 우리도 빨리해야 한다’라는 논리로부터 시작한다. 그 후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해 그들이 간 길을 열심히 학습하고 따라간다. 이러한 방식은 기술개발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정책 결정이나 규제 정비도 ‘미국이나 유럽 등의 선진국은 이러한데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하니 바꾸어야 한다’가 그동안 설득력 있는 구호로 수없이 활용됐다. 이러한 모델은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까지 진입하는 데 효율적인 지름길을 제시했고, 선진국의 성공 사례를 확인하고 따라가니 절대 실패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2030년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앞에 있는 나라들과 경쟁하며 세계 5위권, 나아가 3위권 국가로 향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미국·중국·독일·영국 등의 덩치 큰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들의 발자취를 모방하면서 그들을 앞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는 빠른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first mover)가 되어 세계를 이끌며 남들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멋진 선례들을 부러워하게 해야 한다. BTS나 ‘오징어 게임’ 등의 K팝·K콘텐트의 성공이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도자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선행 조건이 따른다. 바로 실패할 수 있는 자유다. 기술개발이든, 정책 결정이든, 사회적인 시도이든, 남들이 아직 하지 않아서 선례가 존재하지 않거나 답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데 매번 성공적인 결과만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시키는 대로만 잘하는 사람, 틀에서 제시하는 대로만 잘 따라 하는 사람을 키우는 대신 최대의 잠재력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성공을 할 수 있는 개개인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커다란 성공은 두려움 없는 도전에서 나오고, 두려움 없는 도전은 실패가 무섭지 않을 때 가능하다.

벤처기업이 이끌어가는 세상

실패를 대하는 새로운 시각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창업분야다. 그동안 우리나라 경제 발전은 소수의 대기업이 견인해 왔으나 미래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자유분방함, 넘치는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벤처기업이 이끌어 갈 것이다. 그에 상응하여, KAIST를 비롯한 여러 대학이 논문 편수를 늘리는 정책보다 개발된 기술을 바탕으로 교수나 학생들의 창업을 유도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하지만 창업만 독려하고 그 이후에 따라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면, 이는 열정 넘치는 창업가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반쪽짜리 정책일 뿐이다. 한 번의 창업 실패로 재기 불가능한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는 사회에서 누가 과감하게 창업에 도전할 것인가. 실리콘밸리에서도 80%의 창업이 실패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패를 경험한 창업가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도전하고 여러 번의 도전 끝에 커다란 성공 사례를 만든다. 창업 실패가 인생 실패가 아니다. 창업 실패는 도전의 일부며, 그 과정에서 배운 만큼 성공으로 한 발짝 더 나간 자산이다. 따라서 이제는 창업 독려를 넘어, 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기존의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실패한 사람들도 쉽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든든한 사회안전망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빌리은행 같은 제도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현재는 은행에서 돈을 빌린 후 장기 연체된 채권들은 손실로 처리되고, 대부업체 등에 낮은 가격으로 매각된다. 대부업체는 고작 원금의 1~10%의 가격으로 이 채권을 매입한 후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추심하기 위해 따라다닌다. 주빌리은행은 이 부실채권을 대신 사들여 채무자의 빚을 쉽게 탕감해 그들이 사회에 다시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밖에도 실패한 사업가가 재기에 성공한 후 변제할 기회를 주는 유예의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은 연구분야다. 우리나라의 국가 연구개발(R&D) 과제 성공률은 집계 연도에 따라 95%를 넘어 98%, 심지어 99%에 달하기도 한다. 이 숫자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자명하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의 성공률이 100%에 가깝다면 처음부터 성공이 계획됐다는 얘기다. R&D가 실패하면 연구를 충실히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연구팀이, 적절한 연구팀을 선발하고 감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관리부서가, 국가 예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펀딩기관이 쏟아질 비난과 책임을 감수해야 하니, 그 해결책으로 절대 실패하지 않을 계획을 처음부터 만든다.

 

자전거 잘 타려면 자주 넘어져야

즉 실현 가능한 안일한 목표를 세우고 연구를 진행한 것이다. 이렇게 높은 R&D 성공률을 달성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과정에서 사라진 혁신의 기회를 안타까워해야 한다. 우리가 미래 사회에 바라는 것은 매번 성공했다는 보고서가 아닌 소수일지언정 세계를 이끌어갈 혁신적인 연구 결과다. 여러 사람의 시도 중에 한두 사람의 시도만이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같은 사람의 시도도 여러 번 중에 한 번만 혁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자전거를 잘 타기 위해서 누구나 여러 번 넘어져야 하듯, 연구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는 그 자체가 자산이고 경험해서 습득한 또 하나의 교훈이다. 실패해도 괜찮은 연구 비율을 늘리고, 선진국이 했으니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국이 안 했으니 우리가 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사회의 규범과 규정이 적용되는 방식도 유연해져야 한다. 규정이 없다면 비효율이나 부패가 만연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그동안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규정을 열심히 만들어 적용해왔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과거와 미래를 꿰뚫고 모든 상황에 맞는 완결된 규정은 영원히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규범이나 규정이 포함하고 제어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는 예외의 경우가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 사회에서는 적은 세트의 규정만을 가지고 예외로 넘쳐나는 커다란 세상을 제어하려고 고집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창의적이고 융통성 있게 규정을 적용할 수도 있는 재량의 범위를 크게 넓혀 주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재량이 사라진 이유는 간단하다. 규정에 없는, 또는 규정과는 다른 재량의 실시로 인한 실패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해진 대로만, 또는 시킨 대로만 일처리를 했다면 일의 성사 여부와는 상관없이 책임은 피해갈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민원인이 됐을 때, 친절하고 나의 어려운 상황에 공감도 잘해주는 일처리 담당자로부터, 결국에 가서는 규정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답변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당연히 대부분은 규정에 기반을 두겠지만, 결과의 경중을 고려하며 현장 상황에 맞게 창의적이고 융통성 있는 판단과 시도를 가능케 해주면 훨씬 더 유연하게 돌아갈 것이다. 재량에 따라 선례가 없었던 새로운 결정을 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작은 실패 사례도 생길 수 있으나, 그러한 경우들은 향후 더 좋은 규정을 만드는 데 중요한 데이터로 활용될 수도 있다.

숱한 실패 겪은 스페이스X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를 이끄는 선진국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미래를 향한 첫걸음은 개개인이, 사회가, 그리고 정부가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면서 시작돼야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인도를 찾으려 했던 목표에서는 실패한 미션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3M의 포스트잇도 접착력이 낮아 실패한 프로젝트를 다르게 상품화한 경우다. 엔비디아의 테그라는 2007년 아이폰을 타깃으로 한 모바일 프로세서 개발을 목표로 시작되어 삼성이나 퀄컴 등 경쟁사 제품보다 성능은 좋았으나 사이즈와 전력소모가 커서 큰 실패를 맛본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2010년 크기와 전력소모가 문제가 안 되는 자율주행차에 적용돼 커다란 성공사례로 바뀌게 된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수없이 많은 실패에도 결국 재활용 로켓을 우주로 쏘아 올렸다.

이렇듯 실패로 보이는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늘 발생한다. 실패처럼 보이는 결과에 마침표를 찍고 비난을 하기보다는, 쉼표를 찍고 더 커다란 성공을 향한 끝없는 시도의 연장으로 볼 수 있도록 관점을 바꾸도록 하자. 실패가 우리의 일상에서 용납될 때, 대한민국은 세계선도 국가로 성큼 나아갈 수 있다.

◆노준용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전기전자공학 학부를 졸업한 뒤 컴퓨터공학으로 석사를, 전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미국 할리우드에서 그래픽 사이언티스트로 활동했다. 2006년 귀국 후 KAIST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비주얼 미디어 랩을 총괄하고 있으며, 최근까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원장(2016~2020)을 지냈다.

노준용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실패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