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지금 떨어지는 것이 롤러코스터인가, 주가인가, 내 눈물인가?”
[신순규의 월가에서 온 편지]
푸틴이 불러온 증시 파동
주식 잠재가치와 인내의 힘
며칠 전 밸런타인데이. 아내를 위한 꽃이나 선물은 없었다. 아내 역시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사지 않았다.
결혼한 지 26년 된 부부답게 우리는 ‘쿨하게’ 밸런타인데이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아들 데이비드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며칠 후 로스앤젤레스로 대학 캠퍼스 투어를 가기로 했는데, 하루만 더 시간을 내서 디즈니랜드에 가자는 것이었다.
새로운 생긴 기구들이 많아 꼭 가보고 싶다고. “그래, 기분이다!” 어쩔 수 없이 나와 아내는 디즈니 입장권을 샀다.
또 하나 산 게 있다. 그것도 2년 만에 처음으로. 오랫동안 눈여겨봐왔던 L사의 주가가 2020년 8월에 비해 3분의 1 토막이 됐다.
하지만 L사의 본래 가치는 적어도 그날의 주가보다 2배는 족히 넘는다고 믿었다.
그렇게까지 떨어진 건 투자자들이 과민하게 반응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나는 L사의 주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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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계획대로 우리 부부는 데이비드와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비행기로 5시간이 넘는 여행이었다.
대학 입시를 6개월 앞둔 아들은 그곳에 있는 두 대학교를 가고 싶어 했다.
그렇게 먼 곳으로 아들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봉준호와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아들에게 그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캠퍼스 투어. 그 와중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이 증시를 흔들기 시작했고
며칠 전 산 주식은 5%나 하락해버렸다.
캠퍼스 투어는 상상보다 훨씬 흡족스러웠다.
아들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과 남캘리포니아대학(USC)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세 번이나 불합격 통보를 했다는 USC를 더 좋아했다.
물론 학비와 기숙사비가 더 비싼 사립대학이기도 하다.
둘 중 하나라도 합격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디즈니로 향했다.
아들이 디즈니 앱을 활용한 덕분에 하루 만에 놀이 기구를 9개나 탈 수 있었다.
덕분에 그동안 증시 상황을 서너 번밖에 체크하지 않았다.
거의 20%나 더 하락한 L사의 주가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증시보다 중요한 건 점점 심각해지는 우크라이나 상황이었고, 때가 되면 L사의 주가는 원래 가치를 회복할 거라고
믿었다.
놀이 기구 ‘빅 선더 마운틴 열차’는 서부 개척시대의 탄광 열차를 재현해 놓았다.
줄을 서는 중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2010년 여름, 미국에서 나를 키워주신 가족과 오랜만에 여행을 했다.
나를 열다섯 살 때부터 키워주신 미국 엄마가 돌아가신 뒤 5년 만의 여행이었다.
미국 아빠와 20명이 넘는 자녀, 손자, 손녀들이 콜로라도의 리조트로 모여들었다.
그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은 어디서나 활기찬 아이였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온천에서도 신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던 데이비드. 아들이 그때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콜로라도주의 옛 광업 도시에서 드랑고 증기 기관차를 타는 체험이었다.
데이비드는 기차를 좋아했다. ‘토마스와 친구들’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또 봤다.
세상의 온 색깔과 숫자를 토마스를 통해 배울 정도였다.
그러니 드랑고 증기 기관차를 보고 환장할 수밖에! 증기 기관차는 석탄을 통해 증기를 생산하고 엔진을 작동시켰다.
높은 산을 오르는 옛 서부 기차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행복할 줄만 알았던 아들의 여행은 아빠 때문에 눈물로 범벅 되고 만다.
그때 내 신경은 아이가 아닌 다른 데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나는 영국의 석유 회사인 ‘British Petroleum(BP)’의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옵션을 트레이딩하고 있었다.
BP사가 역사에 기록될 만한 환경 재난을 일으킨 바로 그해다.
4월 20일, BP사의 석유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의 해저 석유 굴착 장치가 폭발해 11명이 사망했고, 17명이 큰 부상을 입었으며, 약 320만 배럴의 원유가 바다로 흘러나왔다.
BP사는 원유 유출을 막기 위해 3개월 동안 노력했지만, BP사의 주식은 그날 뉴스에 따라 급등락하며 춤을 췄다.
그런 상황에서 옵션 트레이딩을 하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증기기차를 타면서까지 내 신경은 온통 BP사 주가 움직임에 쏠려
있었다.
10분마다 주가를 체크했다. 석탄재가 눈에 들어갈 수 있으니 3달러짜리 안경을 사서 아이에게 주자는 아내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장사꾼들의 장난이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 눈에 정말 석탄재가 들어갔고, 재를 빼내기 위해 아들은 눈물을 쏙 빼야만 했다.
결국 주식에 정신 나간 아빠가 아들에게 최고의 추억이 될 수 있었던 순간을 망쳐버린 것이었다.
12년 전 후회를 반복할 순 없다. 그래서 이번 캘리포니아 여행에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주가가 22% 떨어지는 일이 벌어져도 의연했다. 대신 아들과 놀이기구를 즐기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아무리 놀이 기구 열차가 급강하한다 해도, ‘아, 내 주가도 이렇게 떨어지는 건가’ 생각하지 않아야만 한다.
어디가 바닥 지점인지 감히 가늠하려는 것도 금지다. 비명 지르는 아내의 손을 잡는 여유까지 보이면 좋다.
만약 이렇게 즐길 수 없다면 주식 투자는 피하라. 그것이 쿨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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