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윤여정 받은 훈장, 그 시작은 '강수연 축하파티'였다
입력 2022.03.26 00:25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2〉33년 ‘절친’ 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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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모스크바영화제에 참가한 김동호 영화진흥공사 사장, 배우 강수연, 임권택 감독,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오른쪽부터).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사진 김동호]
배우 강수연은 33년 전인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를 인연으로 처음 만나 33년간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연이 켜켜이 쌓였다.
나는 그 한 해 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올림픽 기간에 대한극장에서 ‘한국영화 10편 무료상영’ 행사를 열 계획을 세웠다. 내친김에 올림픽이란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당시 수입이 금지됐던 공산권 영화, 그것도 메이저영화제 수상작을 초청해 상영하기로 했다.
당시 세종문화회관 소극장(9월 15~21일)과 테헤란로 현대백화점 토아트홀(9월 15일~10월 2일)에서 열린 ‘우수 외국영화 시사회’엔 소련·유고슬라비아·헝가리 등 18개국 작품 24편이 초청됐다. 당시 자막 시스템이 미비해 소련 등 동유럽 영화들은 대부분 전공 교수들이 교대로 상영관 뒤에 앉아 변사처럼 마이크로 동시통역을 했다.
시사회를 준비하는 동안 캐나다 몬트리올영화제에 출장을 가 있었는데, 초청 소련 영화 중 ‘차이콥스키의 일생’이 상태가 좋지 않아 틀 수 없다는 전화를 받았다. 당시 버마(89년 미얀마로 개명)에서 근무하던 소련 영화수출입공사 동남아 지사장을 한국으로 초청하면 새 필름을 직접 들고 올 수 있다고 했다.
88년 9월 28일 차라그라드스키 지사장이 소련 영화인으론 처음 한국에 왔다. 인사동 한정식집 ‘연진’과 압구정동 카페 ‘고전’에서 밤새 대화를 나눴다. 술을 즐기고 춤과 노래도 잘하는 ‘한량’이었다. 그는 다음 해 7월 열리는 모스크바영화제에 한국 영화를 초청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신감으로 봐선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89년 1월과 6월, 두 차례 더 한국을 찾았다.
임권택 감독 등 훈장 받도록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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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강수연의 귀국환영회가 7월 23일 김포공항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사진 오른쪽부터 김동호 영진공 사장, 강수연, 임권택 감독, 이태원 사장. [사진 김동호]
이런 과정을 거쳐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모스크바영화제 경쟁부문에, 장길수 감독의 ‘아메리카 아메리카’와 변장호 감독의 ‘밀월’이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나는 대표단을 꾸렸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 임권택 감독, 배우 강수연, 문화공보부 강창석 사무관, 김양삼 경향신문 차장, 이형기 한국일보 차장, 정상길 KBS PD, 김승연 KBS 카메라 기자 등 9명이 함께 떠났다. 장명순 ‘스크린’ 기자와 윤호미 조선일보 특파원은 추가 합류했다. 입국비자는 일본에서 받았다. 한국과 소련이 90년 9월 수교하기 1년도 더 전의 일이다.
대표단은 89년 7월 6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과거 문화공보부 장관(74년 9월~75년 12월 재임)으로 모셨던 이원경 주일 대사를 예방했고, 함께 근무했던 윤탁 공사 겸 문화원장을 만났다. 김병연 공사와 김석우 참사관의 도움으로 주일 소련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다. 경기고 후배인 김석우는 그 후 통일부 차관을 지냈고 지금도 만난다.
7월 9일 도쿄를 떠난 일행은 그날 오후 7시 30분 모스크바 센트럴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 ‘아제 아제 바라아제’ 공식 시사회에 참석했다. 임 감독과 강수연의 무대인사에 이어 영화가 상영됐다. 2400석의 넓은 극장을 거의 채운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이어 그날 밤 11시 30분 열린 ‘한국의 밤’ 행사는 성대했고 화려했다. 소련 측에선 리아빈스키 영화부 차관과 유리 호자이예프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많은 인사가 참석했다. 교민들과 함께 김매자씨가 이끄는 창무무용단원 40여 명이 레닌그라드(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개명) 공연을 마치고 모스크바에 왔다가 한복 차림으로 자리를 함께하면서 분위기를 북돋웠다. 사실 나는 출국 전 이를 알고 김매자씨에게 참석을 부탁했다. 고려인 류드밀라 남이 아리랑을 선창하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7월 18일 오후 3시 기자회견이 열렸다. 심사위원장인 거장 안제이 바이다(폴란드) 감독과 에미르 쿠스투리차(유고슬라비아), 장이머우(張藝謀·중국), 아녜스 바르다(프랑스) 감독 등 심사위원들이 단상에 앉았다. 쿠스트리차는 85년 ‘아빠는 출장 중’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장이머우는 ‘붉은 수수밭’으로 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각각 받았다. 베르다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 중 한 명으로 85년 ‘방랑자’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4대 국제영화제다운 심사위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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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 아제 바라아제’ 영화 포스터. [사진 태흥영화사]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강수연이 그날 오후 6시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87년 ‘씨받이’를 출품한 베니스영화제에 이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또다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강수연은 월드 스타가 됐다. 기자회견과 시상식, 크렘린궁의 리셉션에서 집중적인 카메라 세례와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다음날 소련 신문 1면을 장식한 건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보도됐다.
우리는 크렘린궁에서 돌아와 공사 직원의 방에서 새벽까지 자축 파티를 열었다. 파티 도중 올림픽이나 국내외 스포츠 경기에서 수상하면 훈장을 수여하는데, 왜 국제영화제 수상자는 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임 감독과 강수연에게 훈장을 받도록 청와대에 건의하겠다고 약속했다. 귀국 뒤 오랜 기간 정부에서 함께 일한 이연택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찾아가 이를 건의하고 제도화했다.
대표단이 청와대를 예방한 날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물론 ‘씨받이’와 88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배우 신혜수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아다다’까지 소급해서 감독·배우·제작자들이 훈·포장을 받았다. 이때부터 스포츠 대회뿐 아니라 영화제 등 주요 국제 문화·예술 분야의 수상자도 규정을 만들어 훈·포장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최근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배우 윤여정이 훈장을 받은 것도 그 연장이다.
대표단은 7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소련에서 고려인이 많이 사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를 순방하면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상영했다. 91년 독립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이미 이때 영화를 통한 문화교류의 물꼬를 튼 셈이다. 당연히 한국어를 잘할 것으로 여겼던 고려인들과의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지만 수행 통역사에게 스크린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통역하도록 부탁해 위기를 넘겼다.
대표단은 7월 23일 귀국해 김포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모스크바영화제 참가를 계기로 임권택 감독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강수연과 함께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 뒤 강수연은 부산국제영화제 첫해부터 내가 퇴임할 때까지 15년간 개막식·폐막식 단골 사회자로, 때론 심사위원으로서 마치 ‘페스티벌 레이디’ 같은 역할을 맡았다.
강수연, 최근 연상호 감독 ‘정이’ 주연
나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난 뒤인 2013년 단편영화 ‘주리(Jury)’를 만들면서 배우 안성기와 강수연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는 제10회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고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받았다.
2015년 영화 ‘다이빙 벨’의 상영을 둘러싸고 부산시와 부산국제영화제 측이 갈등을 겪자 이용관 당시 집행위원장의 요청으로 강수연이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듬해 2월 이용관의 연임이 좌절되자 강수연은 단독 집행위원장을 맡아 2017년까지 영화제를 이끌었다. 2016년 5월 나는 부산 시장의 후임으로 조직위원장을 맡아 강수연 집행위원장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정상화’한 뒤 2017년 10월 제22회 영화제 폐막식과 동시에 강수연과 함께 이 영화제를 떠났다.
강수연과는 칸·베니스·도쿄·마라케시·마카오 등 국제영화제에는 물론 2015년 파리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 회고전과 2019년 프랑스 영화인 고 피엘 리시앙의 장례식에도 함께 참석했다. 지난해 10월 강릉국제영화제의 제3회 개막식 때 강수연은 정우성·조인성과 함께 오랜만에 레드카펫을 밟았다. 2019년 내가 창설한 국제영화제다.
강수연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곧바로 ‘배우’가 되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부산영화제를 이끌 정도의 리더십이 있는 건 물론, 무엇보다 명석하고 창의적이어서 이따금 강수연에게 어려운 일을 상의한다. 최근 강수연은 연상호 감독의 ‘정이’의 주연을 맡아 촬영을 끝냈다. 넷플릭스를 통해 오랜만에 선보일 그의 연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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