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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신자원민족주의]‘유럽의 빵 공장’ 우크라 사태로 곡물 가격 급등…러시아·터키 등 수출 중단 ‘애그플레이션’ 우려

황태자의 사색 2022. 3. 2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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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신자원민족주의]‘유럽의 빵 공장’ 우크라 사태로 곡물 가격 급등…러시아·터키 등 수출 중단 ‘애그플레이션’ 우려

중앙선데이

입력 2022.03.26 00:21

업데이트 2022.03.2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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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지역 주민들이 8일(현지시간) 밀 포대를 옮긴 뒤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사태로 원유·원자재 가격이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농산물 가격도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농산물 가격 상승이 일반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애그플레이션’(agriculture+inflation)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의 곡물 수입액은 7억5800만 달러(약 9300억원)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의 월평균 곡물 수입액(5억7617만 달러) 대비 40% 가까이 증가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까진 3개월 연속 곡물 수입액이 월별 8억 달러를 넘어선 바 있다. 이는 수요 증가보다는 최근 수개월간 국제 곡물 가격의 가파른 상승에서 비롯된 결과로 풀이된다. 국제연합(UN) 식량농업기구(FAO)가 곡물과 육류·낙농품 등 주요 농산물의 국제 가격 동향을 모니터링, 산출하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지난달 140.7포인트로 전년 동기보다 24.1%나 오르면서 이 지표가 나오기 시작한 1990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존 최고치였던 2011년 2월의 137.6포인트를 11년 만에 갈아치웠다.

전월보다 곡물 가격이 3.0%, 유제품 가격이 6.4%, 유지류 가격은 8.5% 각각 올랐다고 FAO 측은 밝혔다. 이처럼 농산물 가격이 연일 뛰고 있는 것도 우크라이나 사태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러시아가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데다, 우크라이나 역시 ‘유럽의 빵 공장’이라 불릴 정도로 곡창지대가 비옥한 세계 4위의 밀 수출국이다. 두 나라는 세계 밀 공급의 30%가량을 책임지고 있다. 이들 간 전쟁이 당초 예상보다 길어질 조짐을 보이면서 세계적인 식량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인플레이션 우려 속에 대책 마련에 부심하던 각국으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세계식량가격지수 추이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에 대응해 6월 말까지 밀·보리·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수출을 일시적으로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또 비료 수출을 잠정 중단했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내 식량난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요 농산품 수출을 중단한 상태다. 농부들이 군인으로 차출되거나 대피한 데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이미 서울 면적의 2배에 달하는 약 12만 헥타르(㏊) 규모 농지가 훼손돼 중·장기적 수출 전망까지 어두워진 것으로 전해졌다.

직·간접적으로 식량 수출 창고의 문을 걸어 잠근 나라는 이들뿐이 아니다. 터키는 곡물 수출 통제를 강화했고 헝가리는 모든 곡물의 수출을 중단했다. 이집트는 밀과 콩 등의 수출을 중단했다. 아르헨티나도 자국 내의 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도 마련에 나섰다. 이들은 원자재와 마찬가지로 ‘식량 안보’가 수출보다 중요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노르웨이의 비료 생산 업체 야라인터내셔널의 스베인 토레 홀세테르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CNN 인터뷰에서 “‘식량 위기가 올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심각할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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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그나마 중국산 농산물 수입 의존도가 높고, 곡물 중에 밀보다 쌀의 소비량이 많아서 타격이 덜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하지만 수개월간 곡물 수입액 증가세에서 보듯 상황 자체가 낙관적이진 않다. 중국 또한 식량 안보에 더 힘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최근 쌀 가격이 주요 수출국인 미국의 통화 가치 상승(수입국의 통화 가치 하락)에다 수요 증가까지 더해지면서 예상보다 많이 올랐듯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서다. 더구나 밀을 기반으로 가공되는 빵이나 라면 등의 인기 식품류 가격 급등은 여전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실제 국내 밀가루 가격 상승률은 지난해 12월 전년 동기 대비 8.8%에서 올 1월 12.1%, 지난달 13.6%로 껑충 뛰었다. 그 결과 빵 가격은 8.5%, 파스타면 가격은 13.2%가 각각 올랐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2020년 기준 사료용을 포함했을 때 21.0%, 사료용을 제외해도 45.8%에 그쳤다. 그중 밀의 자급률은 고작 0.8%였다. 99%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국제 유가나 비철금속 가격은 단기적으로 문제가 해소되면 공급이 늘면서 안정될 수도 있지만 수확에 긴 시간이 소요되는 곡물은 단기간 가격 급등세가 진정되기 쉽지 않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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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분 업계 관계자는 “밀가루의 주원료인 소맥은 (러시아·우크라이나가 아닌) 미국과 호주에서 주로 수입하고 있어 당장 공급 차질이 우려되는 상황까진 아니다”면서도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제 밀 가격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일부 대책을 내놓고 향후 상황 변화에 따라 추가 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4일 사료 및 식품 원료의 구매 자금 금리 0.5%포인트 인하(2.5~3.0%→2.0~2.5%), 사료용 곡물을 대체할 수 있는 원료에 대한 할당 물량 확대(겉보리 4만→10만t, 소맥피 3만→6만t)를 관련 업계 지원책으로 제시했다.

다만 일각에선 밀 가격 급등의 경우 또 다른 주요 밀 생산국인 인도의 ‘깜짝 등장’으로 우려보다 장기화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인도는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와 또 다른 주요 밀 공급국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세계 시장에 자국 밀을 팔 기회로 보고 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15일(현지시간) 인도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 “인도가 이번 전쟁을 기회로 보고 지난해 612만t이었던 밀 수출량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며 “이달 수확철 이후 1000만t 수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간 인도는 넓은 농지와 풍부한 인력을 바탕으로 많은 밀을 생산하고도 물류 문제로 수출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 정부는 밀 수송용 철도차량을 늘리고 주요 항만에서 수출 우선권을 주는 식으로 이 문제를 극복할 계획이라고 로이터통신은 덧붙였다. 이와 함께 그간 인도는 주로 서해안의 항만 2곳을 통해 밀을 수출해왔지만, 동해안을 포함한 다른 항만도 곧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