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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와 할당제 사이

황태자의 사색 2022. 3. 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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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와 할당제 사이

중앙일보

입력 2022.03.30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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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기자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구독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의 한글판 부제는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다. 답은 ‘아니다’다. 보통 능력ㆍ성과에 맞게 보상받는 능력주의를 공정성ㆍ효율성의 보루로 여기지만, 능력ㆍ재능에는 운이 작용하며, 능력주의의 맹신은 능력주의의 폭압으로 이어진다는 요지다.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처럼 ”내가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한 운이다. 노력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사회를 만난 것도 시대를 잘 만난 행운의 결과“라고 그는 썼다. 승자들은 자신의 행운에 겸손해야 한다는 게 결론. 물론 그렇다면 패자들은 자신의 무능과 불행을 그저 ‘불운’으로 여겨야 하는가, 모든 것은 ‘운빨’인가 의아한 대목도 있지만, 능력주의의 한계를 지적해 반향이 컸다.
‘능력대로’ ‘능력 위주’ 슬로건이 지금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공정성이라는 시대정신, 2030 남성들의 역차별론과 맞물리면서 새 정부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예상대로 할당제를 손보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성별, 지역 안배 없는 능력 위주“의 인수위원회 인선에 이어 향후 조각(組閣)에서도 ”자리 나눠먹기 식으로는 국민통합이 안 된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6ㆍ1 지방선거 공천에서 ”젊은 세대,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 할당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최근 국가장학재단이 여학생들의 이공계 진학 장려를 위해 적용하던 여학생 장학금 할당 권고 조항을 삭제하자 자신의 SNS에 “장학금도, 창업지원금도, 공무원 취업도 할당보다는 공정한 원칙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윤석열 정부는 젠더뉴트럴(성 중립) 정책을 강화할 것”이라고 썼다. 젠더 할당제를 사회분열의 주범쯤으로 규정했다.

공무원 시험에서 특정 성 합격자가 70%를 넘지 못하게 하는 '공무원 양성평등 채용 목표제'는 남녀 모두가 수혜를 입고 있다. 지난해 국가 공무원 9급 공채 응시생들이 면접시험을 보가 위해 대기 중인 모습. [연합뉴스]

 물론 능력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곳에 능력 중심 원칙은 중요하다. 인위적인 쿼터가 무자격자의 무임승차권과 동의어라면 문제다. 지금껏 연고주의가 강한 한국 정치에서 “능력주의는 엽관제(정실 인사)를 타파하는 효과적인 무기이고, ‘정치인 자격시험’ 같은 능력주의에는 한국의 연령·서열문화를 깨부수는 통쾌함”(교육평론가 이범)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대표성과 다양성이 중요한 영역, 구조적 차별이 있는 곳에 능력주의라는 만능 검을 휘두른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능력주의의 강조가 오직 여성 할당제 폐지를 조준한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윤 당선인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거듭 천명했지만, 성차별을 용인하는 법ㆍ제도가 없다고 해서 구조적 성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조적 차별은 법과 제도를 넘어, 문화와 관습을 통해, 일상의 권력관계 속에 실재하고 작동한다. 현재 법과 제도로 정해진 성별 할당제는 ▶비례대표 후보 50% 여성 할당제 ▶한 성이 70%를 넘지 못하게 하는 공무원 시험 양성평등 채용목표제 ▶시총 2조원 이상 회사는 최소 1명 이상의 여성 이사를 두어야 하는 여성 임원 할당제 ▶2030년까지 25% 이상으로 맞춘다는 국공립대 여성 교수 할당제가 있다. 과연 어디에 여성이 과대 대표되는 불공정한 특혜가 존재하는가. 공무원 양성평등 채용목표제는 남성도 수혜를 보고 있고, 교육대학들은 알아서 여학생이 60~80%를 넘지 못하도록 남성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영화나 창업 지원사업의 여성 가산점도 논란이 있는데, 제도에 대한 오해가 크다.
  지난 14일 독일의 차이트 온라인은 “2027년까지 유럽연합(EU)의 상장기업 이사회 3명 중 1명은 여성이 차지할 전망”이라며 “대다수의 EU 국가가 해당 여성 할당제 도입에 동의했다”고 보도했다. 노르웨이를 필두로 핀란드ㆍ 아이슬란드ㆍ 프랑스ㆍ 독일ㆍ 이탈리아ㆍ 벨기에ㆍ 스페인ㆍ 네덜란드 등에서 실시 중인 여성 임원 30~40% 할당제를 EU 회원국 전체로 확대하는 것이다. EU 이사회는 “이 합의가 유리천장을 깨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며 “경영 관리 직책에서 여성의 비율이 높으면 경제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얘기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