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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비극의 파도 덮쳐왔지만…온몸으로 맞선 '이민자 여인'

황태자의 사색 2022. 4. 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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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비극의 파도 덮쳐왔지만…온몸으로 맞선 '이민자 여인'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돌풍 4가지 요인

젊은시절 늘 불행과 맞닥뜨렸지만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던 `선자`

  • 김유태 기자
  • 입력 : 2022.04.08 17:09:25   수정 : 2022.04.08 20: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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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선자 역을 맡은 배우 김민하. 1995년생인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가는 시골 소녀의 모습을 열연했다. [사진 제공 = 애플TV]
'한 여성의 강인한 정신을 담은 시리즈 중에서도 쉽게 볼 수 없던 보석.' '지금까지 나온 애플TV플러스 최고의 쇼.' 드라마 '파친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외신은 연일 극찬을 보내고,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된 제1화는 2주 만에 누적 조회 수 1050만회(7일 기준)를 돌파했다. 세계적인 평론·리뷰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신선도 지수는 98%로 사실상 만점을 기록해 '기생충'(98%), '미나리'(98%)에도 밀리지 않는다.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파친코 신드롬'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 9월 미국 에미상 유력후보인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작이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가 되리란 전망까지 움튼다.

드라마 '파친코'는 왜 돌풍일까. 전문가와 외신 도움을 받아 '파친코' 흥행 요인을 분석해 봤다.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돼 있다.

◆ "모든 가정엔 '선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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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줄거리부터. '파친코'는 1915년 부산 영도 한 하숙집에서 시작된다. 손바닥만 한 안주 한 그릇에 뱃사람 넷이 막걸리잔을 부딪히며 모여 앉은 궁핍한 세월. 생활력 강한 어머니 '양진'과 다리가 불편한 절름발이 아버지 '훈'은 무엇이 죄가 되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일제강점기 시절을 버티며 외동딸 선자를 강인하게 키운다.

시간이 흘러 1989년 미국 뉴욕. 초고층 빌딩 안 검은 탁자에 '솔로몬'이 앉아 있다. 예일대를 졸업한 수재로, 금융회사에 재직 중인 솔로몬은 "회사 명운을 걸고 도쿄에서 불거진 난제를 해결할 테니, 부사장 승진을 약속해달라"는 '딜'을 하고 있다. 자이니치(재일 한인)인 솔로몬은 선자의 자랑스러운 손자다. 오사카로 떠난 솔로몬은 그리운 할머니 집에 도착한다.

다시, 과거의 부산 영도. 그 옛날의 선자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억겁의 눈물을 가슴에 싣고 고향을 무력하게 떠나야 했다. 새 삶을 위한 당시 유일한 선택지는 일본행이었다. 선자는 자이니치에겐 방 한 칸 빌려주지 않는 일본인 틈바구니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고도 결국 살아남았다. 시간이 흘러 74년 뒤인 1989년, 선자는 '유골을 고향에 뿌려달라'는 큰동서의 유지를 받들고자 50년 만에 처음으로 부산 영도행 비행기에 오른다. 불행이 결코 비켜가는 법이 없던 한 여성의 생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 비극을 통시적으로 조명하고, 그럼에도 사는 날이 다할 때까지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던 한 인간의 생명력을 '파친코'는 담담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파친코' 제작자 수 휴는 "모든 가정에는 그들의 삶 속에 '선자'가 있다.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경험, 자식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주기 위해 새 삶을 찾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1900년대 부산 영도, 젊은 선자(왼쪽)와 생선중개상 고한수(배우 이민호). 선자는 한수와의 뜻하지않은 임신으로 일본에 가게 된다. [사진 제공 = 애플TV]


◆ 오스카상에 값한 윤여정


주연, 조연, 단역을 구별할 것 없는 전(全) 출연진의 호소력 강한 명연기, 그 안에서 들려오는 구수한 부산 사투리는 '파친코' 최대 매력이다. 그 중심에 '배우 윤여정'이 있다.

8부작 중 5회까지 공개된 '파친코'에서 최고 장면은 노년의 선자가 부산으로 가는 4회 마지막 장면이 주로 꼽힌다. 반세기 만에 밟은 고향 땅에서 선자는 강한 회한에 잠긴 듯 택시에서 내려 폭우가 내리는 바다에 일평생 상처 받은 몸을 내맡긴다. 검은 지평선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윤여정식 '회한의 연기'는 그가 영화 '미나리' 순자 역할로 거머쥔 2021년 제93회 오스카 여우조연상에 충분히 값한다.


1989년 일본 오사카에서 살아가는 노년의 선자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 [사진 제공 = 애플TV]
주근깨 가득한 젊은 선자 역의 배우 김민하의 열연은 극 전체를 움켜쥔다. 1995년생 김민하는 '대선배' 윤여정과 견주며 "윤여정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는 찬사를 뉴욕타임스에서 받을 정도로 주목을 끌고 있다. "영혼을 갈아 4개월간 오디션을 봤다"는 김민하는 쫓겨난 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드라마 곳곳에서 풀어낸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젊은 선자가 겪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이 든 선자의 연기에 녹아들고 있다. 두 배우의 앙상블은 드라마의 가장 큰 힘"이라며 "티켓 파워보다는 필요한 배우를 정확하게 썼다는 게 '파친코'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두 선자'의 연기 이면에서 선자 어머니 양진 역할의 배우 정인지, 선자 아버지 훈 역할의 배우 이대호의 연기도 극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아들 셋을 질병과 사고로 잃고도 딸 선자를 잉태한 어머니 양진의 굳센 의지는 선자가 한 인간으로서 잊지 말아야 했던 강인한 생명력을, '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뭔 짓을 해서라도 시상 드러븐 것들이 니 건들지 못하게 할 기다'라며 선자에게 다짐하는 아버지 훈은 선자가 훗날 한 자식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기억해야 할 부모의 자격을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

재치 넘치는 배우들 연기는 또 다른 볼거리다. 손자 솔로몬의 제안을 잘 듣지도 않던 선자가, 자신이 모시는 젊은 목사의 똑같은 제안에는 "무조건 옳다"며 따르는 모습, 그런 할머니를 못마땅하다며 째려보는 솔로몬의 무표정한 얼굴은 극의 긴장감을 잠시 누그러뜨린다.

◆ 파친코 쇠구슬에 담긴 의미


드라마 전반에 작동하는 은유와 상징은 극의 수준을 끌어올린다. 먼저, 드라마 제목부터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파친코는 일본 고유의 '국민 도박 기계'로, 막대를 내리거나 단추를 누르면 참가자가 미리 넣어둔 쇠구슬이 수십 개 핀이 박힌 길을 무작위로 통과하며 결과를 내는 게임을 총칭한다. 파친코 기원에 대해선 설이 분분한데,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물자로 쓰이던 베어링볼을 처리하려 도박 기계를 만들었다는 후문이 지배적이다.

선자의 아들이자 솔로몬의 아버지인 '모자수'는,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누구도 일자리를 주지 않는 일본에서 살아남고자 파친코 가게를 운영하고 그 돈으로 가족을 먹여살렸다. 자이니치의 삶, 선자에서 모자수로, 모자수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운명은 결국 쇠구슬의 운명을 닮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파친코 쇠구슬의 임의성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인간 운명의 불확실성을 가리킨다.

'파친코' 원작자인 이민진 작가는 작년 9월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파친코를 제목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파친코라는 게임 자체가 사람의 삶을 비유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고 어떻게든 플레이해야 하는, 그러나 조작되고 불공정한 게임이란 점에서 파친코란 소재를 소설로 담고자 했다"고 답한 바 있다.

극 중 '땅 주인 할머니'가 토지 매각비용으로 받지 않은 '10억엔'의 거금도 은유적이다. 솔로몬이 일본으로 가 만난 '땅 주인 할머니'는 도쿄 한복판의 낡은 저택을 끝내 팔지 않는다. 회사를 대표해 솔로몬이 제안했던 금액은 공교롭게도 한일 위안부 합의출연금과 액수가 같다. 이 때문에 온라인에선 저 돈이 위안부 합의금을 은유했다는 해석이 퍼지고 있다.

한편, '땅 주인 할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는 1958년생 연극배우 박혜진으로 '오징어 게임'에서 생선가게를 꾸리던 상우엄마로 출연했던 배우다. '오징어 게임'과 '파친코'에 동시에 출연한 배우는 박혜진이 유일하다.

◆ '회당 100억원'이 구현한 삶


"선자 어매도 먹음서 설움 쪼매 삼키라이." 미곡점 사장이 선자의 모친 양진에게 건네는 이 대사는 가슴 뭉클해지는 순간으로 회자된다. 양진은 선자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따뜻한 쌀밥 한 그릇을 먹이고자 쌀집 주인에게 '쌀 두 홉'을 간청한다. 일본 사람들에게 팔 쌀이 모자라면 큰일 나기 때문에 곤란하다며 완강히 맞서던 주인은 '선자가 일본으로 떠나 언제 볼지 모른다'는 양진의 사정에 말없이 '쌀 세 홉'을 주며 양진의 설움을 달랜다.

양진이 지어준 따뜻한 쌀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선자는 노년에 이르러 한국에서 온 쌀을 대번에 알아차린다. 정덕현 평론가는 "쓱 지나가는 것 같지만 모두 연결돼 있는 대목이 많다. 시간을 초극해 맛을 기억하는 선자의 설정은 '파친코'의 놀라운 힘"이라고 말했다.

이 장면에서 보듯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젊은 선자가 일제강점기 불량 낭인들에게 성희롱을 당할 위기에 처하는 장면, 단 한 번의 말실수로 사람들이 보는 대낮에 순사들에게 발길질을 당하는 뱃사람 모습 등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한일 관계의 시초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파친코'는 총제작비 1000억원, 회당 제작비 100억원이 넘는 대작이다. 뛰어난 영상미와 시대 고증도 '파친코'의 또 다른 성취다. 나무상자에 담긴 생선과 손으로 쓸어담는 홍합 등 극중 주요 무대인 부둣가 선창의 풍경이 정말로 그 시대로 되돌아간듯 재현돼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미국 록밴드그룹 그래스 루츠의 1967년 히트곡 '렛츠 리브 포 투데이(Let's Live For Today)'를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도 화제다. 파친코 사업장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한 명씩 나와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이 지극히 진경이어서, 대개 드라마를 볼 때마다 '오프닝 건너뛰기'를 누르던 시청자까지도 이번 '파친코'만큼은 오프닝 장면부터 다 챙겨본다는 후기를 남기고 있다.

정 평론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사는 '이민자 시선'의 이야기로, 언어와 국가로 나뉜 민족주의 시대에 경계선을 넘어야 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측면에서 환영받고 있다"며 "에미상 시상식에서 '파친코'는 '오징어 게임'과 충분히 경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