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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기발한 상상력…현실과 환상 오가며 부조리 묘파

황태자의 사색 2022. 4. 1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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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기발한 상상력…현실과 환상 오가며 부조리 묘파

부커상 최종 후보작 정보라 소설집 `저주 토끼`

저주인형으로 복수극
인간 배설물 괴물 등
강한 서사가 돋보이는
초현실주의 단편 10편
소름끼치는 반전 매력

부커재단 호평에 수상기대

  • 김유태 기자
  • 입력 : 2022.04.11 17:39:38   수정 : 2022.04.11 17: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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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부커상 웹사이트에 지금 접속하면, 한국인 작가의 소설책 사진이 눈에 띈다. 정보라 소설집 '저주 토끼' 영문판(Cursed Bunny)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인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 '야곱의 서'가 그 옆으로 나란하고 가와카미 미에코(일본), 클라우디아 피네이로(아르헨티나), 기탄잘리 슈리(인도네시아), 욘 포세(노르웨이)의 책도 보인다.

한데 모인 여섯 작품 중에서, 유럽 최고 권위의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2022년 수상작이 나온다. 한강 '채식주의자'가 수상해 신문 1면과 방송 뉴스 헤드라인을 전부 도배한 바로 그 상이다.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한국인 작가가 이름을 올린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소설 '저주 토끼'는 5월 26일(현지시간) 발표되는 부커상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될 수 있을까.

동시대를 사는 개인의 이야기가 자기증식하는 듯한 문학시장에서 정보라의 '저주 토끼'에 실린 10편의 초현실주의 단편은 목소리가 또렷하다. 한 장면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듯한 겉치레 묘사가 없고 모든 소설이 '이제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되지?'란 질문을 품게 할 만큼 강한 서사성도 매력이다.

책에 첫 번째 소설로 실린 단편 '저주 토끼'의 화자는 손자다. 대대로 저주 받은 물건을 제작해 팔아온 조부는 오래 전 일화를 손자에게 들려준다.

전통 양조장을 운영하던 조부의 친구는 경쟁사의 음해로 무너져 생을 마감했다. 친구의 죽음에 분노한 조부는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선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저주가 깃든 토끼 모양 전등을 친구 경쟁사 사장에게 보낸다.

창고에 방치된 전등이 밤사이 진짜 토끼로 변해 창고의 종이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현금, 수표, 어음까지 죄다 갉히고 씹힌다. 그러다 경쟁사 사장의 손자가 전등의 스위치를 만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제야 토끼는 종이 대신 '다른 것'을 갉아먹기 시작하는데, 그럴수록 경쟁사 사장의 손자는 악다구니를 쓰며 전등에 집착한다. 왜 토끼는 종이를 먹기 시작했을까. 그런데 잠깐, 화자의 조부는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소름 끼치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현실과 꿈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괴이하지만 잘 지워지지 않은 얼룩같은 감정까지 남기는 소설은 두 번째 단편 '머리'다.

화장실 거울을 보던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는 어느 날 변기 속에서 고개를 내민 채 자신을 "어머니"로 호칭하는 괴상한 물체를 마주한다. '그것'은 눈을 제대로 못 뜬 사람의 두상을 닮았는데, 형체가 일그러져 무엇인지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다. '머리'는 여성이 살아가는 집의 변기를 옮겨다니며 빠진 머리카락, 배설물, 뒤를 닦은 휴지 등으로 자신의 몸을 이룬 괴이한 녀석이었다. '머리'는 여성에게 부탁한다. "어머니, 변기 안에 오물을 버려주시면 그것으로 나머지 몸을 이루겠습니다. 그러면 멀리 떠나 제 힘으로 살아가겠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머리'를 멸시하고 박대한다. 수년이 흘러, 여성이 버린 오물과 부산물로 완전한 신체를 이룬 '머리'는 이제 주인공 여성의 완벽한 젊은 날을 빼닮았다. 거울에는 늙어 추해진 주인공 야상의 모습이 동시에 비친다. 거울 속의 두 여성, 진짜 '나'는 누구여야 할까. 프란츠 카프카의 부조리극,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라는 점에서는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다음 단편 '차가운 손가락'은 사고 후 온통 시꺼메진 세상에서 깨어난 한 남성의 이야기다.

절대 흑색의 어둠, 교통사고가 분명한 상황에서 남성은 앞이 보이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 여성이 그를 부축해 이동하면서 사고 발생 경위를 들려준다. 처음에는 직장동료 신혼집들이었다가, 이혼하고 자취방 집들이를 다녀오는 것으로 말이 바뀌었다가, 다시 장례식이었다는 불가해한 이야기를 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져 물으면 여성은 "머리를 많이 다친 것 같다"며 남성을 질책한다.


그녀는 누구이고, 또 지금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런데 내가 살아 있기는 한 걸까. 몽환적인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먼곳을 쳐다보게 된다.

책에는 '몸하다' '안녕, 내 사랑' '덫' '흉터' '즐거운 나의 집'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재회' 등 단편도 실려 있다. 부커재단은 정보라의 소설 '저주 토끼'에 대해 "마술적 사실주의, 공포, 공상과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장르를 초월한 책"이라고 평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