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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부가 빛났을 때

황태자의 사색 2022. 4. 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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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부가 빛났을 때

중앙일보

입력 2022.04.1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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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사회적 요구는 어떻게 정책이 되었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태국에서 온 질문

얼마 전 태국의 한 학생으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태국은 거듭되는 군부의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그 악순환을 끊었느냐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바로 떠오른 것은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해체였다. 그런데 해체의 주인공은 진보 정부가 아니라 보수 정부였다. 진보 정부였다면, 군 내 정치적 파벌을 해체할 수 있었을까?

박정희 정부 하면 누구나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을 통한 경제성장과 중앙정보부와 유신체제 하에서의 인권탄압과 민주주의의 말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 없이 자주 등장하는 정책이 있다. 고교평준화 정책이다. 가족과 관련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이래의 교육정책에 대한 거대한 재편이었다.

고교 평준화, 의료보험제,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보수 정부, 시대가 요구한 정책들 잡음 없이 이뤄내
보수가 진보 정책, 진보가 보수 정책 펴는 게 자유로워
5년 만의 보수정부, 역사에 기억될 정책은 무엇일까

의료보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1963년 법률 제1623호로 의료보험법이 제정되었지만, 임의가입 방식이었다. 1977년 의료보험법이 완전히 개정되어 5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무가입이 실시되었다. 1989년에 가서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이 실시되었지만, 공공기관이 담당하는 한국의 의료보험제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공공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의료보험, 그린벨트, 그리고 6·23 선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그린벨트는 도시개발을 밀어붙였던 박정희 정부에 맞지 않는 정책이었다. 1971년 세종로 사거리에서 반경 15㎞에 걸쳐 폭 2~10㎞를 ‘영구녹지대’로 지정하였다. 이후 1977년 4월까지 전 국토의 5.4%가 그린벨트로 지정되었다. 그린벨트의 80%가 사유지였기에 헌법상 사적소유권 보호와 배치되는 문제가 있었지만, 공직자 2500여 명이 관리소흘로 징계를 받는 등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다. 노태우 정부, 김대중 정부, 박근혜 정부를 통해 그린벨트는 대거 해제되었고, 이는 수도권 과밀화를 촉진하였다.

또 다른 기억은 1973년 6·23 선언이다. 박정희 정부의 반공정책은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민들을 옥죄었다. 그런 상황에서 6·23 선언은 ‘북한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5항)는 조항과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6항)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남베트남 패망과 판문점 도끼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추진되지 않았지만,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의 단초를 제공했다.

전두환 정부에서도 아웅산 테러사건이나 평화의 댐 소동이 있었지만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면서 서울의 주한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들이 점거를 푸는 감동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평양을 방문한 방송사의 카메라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일상이 방송되기도 했다.

7·7 선언과 토지공개념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은 보수 정부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정책이었다. 1989년 한 해 동안 시국 사범이 1500여 명 늘어나고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국내 좌경 실상 자료집’을 발표하면서 공안정국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교장이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후 소련·중국과 수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그리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주한미군의 핵무기 철수 등 전향적인 정책이 이어졌다. 6·23 선언을 계승한 7·7선언은 이후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의 초석을 놓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국민연금이 시작된 것도 1988년 1월이었으며, 1989년 7월에는 전 국민 의료보험시대가 열렸다. 1990년에는 ‘장애인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토지공개념이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9년 토지 과다 보유세가 부과되기 시작했고 공시지가 제도와 분양가 상한제가 도입되었다.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민주자유당으로의 합당을 통해 등장한 김영삼 정부의 정책은 그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김영삼은 평생을 야당 지도자로 살았음에도 정권을 잡기 위해 신군부와의 합당을 감행했다. 김영삼 정부가 1961년 이후 30년 만의 첫 민간인 정부라고 했지만, 강경한 군부와 보수,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던 재벌을 건드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비록 장기수의 북한 송환과 남북정상회담 추진이 김일성 사망 이후 조문파동이라는 역풍을 맞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군내 정치적 파벌인 하나회 척결을 이루었다. 당시 하나회 소속의 군인들이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1·3군 사령관, 2작전 사령관, 합참 작전부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군 통수권자로서 이들을 모두 예편 또는 좌천 조치했다.

금융실명제는 가위 혁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자금의 불법적 사용은 차명 계좌를 통해 가능했으며, 조세 회피를 위해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 장영자 사건 이후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기업 활동의 위축과 경제상황 악화를 이유로 그 실시가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대통령 긴급명령의 형식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였다.

보수이기에 할 수 있는 정책

역대 보수 정부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은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정책으로부터 나왔다. 보수 정부에서 예상되는 정책은 그다지 감동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진보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국민들이 감동을 받는 정책은 기대하고 예상했던 정책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에도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정책이 나왔을 때 사회적으로는 더 논란이 없었으며, 역사적으로 더 중요하게 기억되고 있다. 논란이 될 수 있는 정책임에도 보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정책이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강한 상황에서 진보가 진보를 하면 의심을 받지만, 보수가 진보를 하면, 누구도 이데올로기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를 했듯이.

미국에서 닉슨이 당선되었을 때 그 누구도 그의 중국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닉슨은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 중 하나이며, 1950년을 전후한 시기 매카시즘에도 관련된 정치인이었다. 보수의 끝에 서 있었던 닉슨이 캄보디아로의 전선을 확대한 건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고, 칠레의 아옌데에 반대하는 쿠데타의 지원은 민주주의를 파괴함으로써 역사적으로 큰 비판을 받고 있다.

반면, 그의 중국 방문과 마오쩌둥과의 마오타이 건배는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실패, 미국의 경제적·재정적 상황의 악화가 보수적이었던 닉슨을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그는 강력한 반공정책보다는 데탕트를 통해 당시의 현실을 직시했다.

닉슨과 아이젠하워의 기억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전선의 미군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재임 기간 중 대량보복전략을 통해 국방의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대외원조도 군사안보법 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에 대한 역사의 기억은 그가 퇴임하면서 남긴 연설이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군산복합체가 통제 불가능한 영향력을 갖게 될 수도 있기에, 정부는 그 영향력을 경계해야 한다. 잘못 주어진 권력이 재앙처럼 발호할 가능성은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5년 만에 보수정부가 다시 시작된다. 진보정부 이전에 있었던 보수정부의 9년간의 실험은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고, 인상적인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광우병, 4대강, 통일대박, 사드, 위안부 합의, 국정농단 등이 남아 있는 기억이다. 새로 시작하는 보수정부는 역사 속에 어떤 향기를 남길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보수가 진보를 할 때, 그리고 진보가 보수를 할 때 여론으로부터 더 자유로우며 역사에서 더 깊이 기억하게 된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