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부터 아이스크림·라면에까지 설정된 ‘세계관’이란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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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인간에게는 각자 æ(아이)가 있는데, 디지털세계에서 자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형성된 또 다른 자아인 동시에 독립된 인격을 지닌 존재를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아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활발히 교류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과 아이의 연결을 SYNK(싱크)라고 한다. 한편 현실세계와 디지털세계 너머로 미지의 세계인 KWANGYA(광야)가 있는데, 이는 무규칙·무정형·무한의 영역이다. 어느 날 광야에 나타난 독사 모습의 불길한 존재 블랙맘바가 인간과 아이의 싱크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문제를 해결하러 광야로 향한다.’
이것은 SF 판타지 영화의 줄거리가 아니다. 인기 걸그룹 에스파(aespa)의 난해하기로 유명한 노래 가사와 뮤직비디오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계관’이다. 에스파가 소속된 SM엔터테인먼트는 이 설정을 확장해서 SM에 소속된 다른 밴드들과 가수들도 공유하는 거대한 세계관 ‘SM 컬처 유니버스’를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이그룹 엑소(EXO), 엔시티 유(NCT U), 엔시티 드림(NCT Dream)의 노래 가사에도 ‘광야’라는 말이 종종 튀어나온다.
의인화된 식품이 사는 세상까지
‘세계관’이 돈 된다는 생각에 빠져
억지 스토리 남발하는 건 경계해야
마치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어벤져스’ 시리즈의 캐릭터들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라고 불리는 거대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과 비슷하다. 본래 ‘세계관(worldview)’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 즉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나 틀을 의미하지만, 요즘 문화계에서 회자되는 ‘세계관’은 별개의 이야기들과 캐릭터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배경으로서의 가상세계 설정을 의미하곤 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전에는 주로 판타지·SF 창작물에서만 다뤄지던 개념이었다. 고전적인 예로는, 영국의 언어학자 J.R.R. 톨킨 (1892~1973)이 북유럽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 『호빗』 등에서 공통적으로 펼쳐 보인, ‘가운데 땅(The Middle Earth)’이라는 허구의 공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 있다.
판타지소설 용어에서 아이돌 팬덤 용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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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에스파 멤버들과 일종의 아바타인 æ(아이)들. [사진 SM 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최근에는 세계관이 K팝 팬덤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용어가 되었다. SM의 경우, 에스파에 앞서서 이미 10년 전 엑소를 데뷔시킬 때 엑소 멤버들이 엑소플래닛(exoplanet, 태양계 밖의 행성)에서 온 초능력을 지닌 인물들이라는 세계관을 제시했었다. 방탄소년단 또한 모든 노래에서는 아니지만 ‘화양연화’ ‘Love Yourself’ 등 주요 앨범 시리즈에서 ‘BU(BTS Universe)’라고 불리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멤버 각자의 본명을 딴 캐릭터들이 불우한 가정, 심신의 질병, 가난 등의 문제와 싸우며 성장의 아픔을 겪는다는 설정으로, 그중 한 캐릭터가 시간여행을 통해 이들의 비극을 막으려 한다는 이야기다.
K팝 그룹들의 세계관은 명쾌하게 설명되기보다 퍼즐 조각처럼 노래 가사와 뮤직비디오 등등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팬들이 열성적으로 단서를 찾고 각자의 해석을 내놓으면서 더욱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팬덤을 구축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인 효과로 연결된다. 팬들이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해당 그룹의 전 앨범을 구입하고 관련된 굿즈까지 사곤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세계관은 쉽게 웹툰·게임·드라마·영화 등의 파생 콘텐트로 발전할 수 있다. 실제로 하이브(HYBE)는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웹툰과 웹소설을 내놓았다. 또한 SM의 에스파는 멤버가 4명이 아니라 그들의 ‘æ(아이),’ 즉 메타버스 아바타까지 합친 8명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메타버스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향후 여러 파생적인 메타버스 콘텐트 비즈니스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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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우스 세계관’을 보여주는 빙그레 인스타그램.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세계관은 이제 유통업계까지 스며들고 있다. 빙그레는 2년 전부터 이른바 ‘병맛’ 유머로 가득한 ‘빙그레우스 세계관’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선보이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자사 브랜드를 의인화한 만화 캐릭터인 미남 왕자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맛있으)’와 ‘메로나’ 아이스크림을 의인화한 ‘옹떼 메로나 부르쟝’ 공작 (유행어 ‘올 때 메로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등이 등장하는 세계관이다. 이 프로모션을 기획한 ‘스튜디오좋’은 최근에 뮤지컬 애니메이션 형식의 ‘삼양식품 세계관’을 만들어서 또 다시 인기를 모았다. 오랜 기본 라면인 ‘삼양라면’을 상징하는 양 캐릭터와 신제품인 ‘불닭볶음면’을 상징하는 닭 캐릭터가 어이없을 정도로 진지하고 웅장하게 경쟁을 벌이는 내용이다.
일회성 마케팅으로 그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더 발전해서 파생 콘텐트를 낳을지 누가 알랴.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모험영화 프랜차이즈 ‘캐리비언의 해적’(2003~2017)도 사실 ‘원작’은 디즈니랜드의 55년 묵은 동명의 놀이기구였다. 월트 디즈니(1901~1966)가 생전에 직접 고안하고 제작을 감독한 최후의 놀이기구였다고 한다. ‘캐리비언의 해적’ 영화 다섯 편은 약 5조원에 달하는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올렸다.
21세기 신화전설의 동력은 자본주의?
재미있는 것은 K팝과 기업 브랜드의 세계관 스토리텔링이 인류의 고전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참마 카운다 교수는 지난해 코리아중앙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에스파 및 SM의 세계관이 그리스도교 성경의 내용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처럼 에스파 세계관에서도 유혹자가 블랙맘바 뱀으로 나타난다. 특히 ‘광야’라는 설정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고행을 하며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친숙하고 원형적인 설정을 통해 쉽게 이해되고 널리 어필하는 스토리텔링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카운다 교수와 여러 전문가들은 말했다.
한편, ‘빙그레우스 세계관’이나 ‘삼양식품 세계관’에서 대표 제품들이 의인화되어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그리스·로마 신화 등 많은 신화에서 해와 달, 천둥과 번개, 강과 바다 같은 자연물과 자연현상이 신과 정령으로 의인화되어 이야기를 펼치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은 태고부터 별로 변하지 않은 것이다. 바뀐 것은 이야기를 하는 동기다.
가장 오래된 이야기인 신화와 신화적 세계 설정은 왜 폭풍이 치는가, 은하수는 무엇인가, 등등의 우주와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 그와 관련된 인간의 의례와 문물을 규정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반면에 21세기의 세계관과 이야기는 팬덤을 형성할 수 있는 프로모션을 위해, 그리고 그것이 낳는 경제적 효과를 위해 탄생한다. 21세기 신화전설의 동력은 자본주의인 셈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세계관이 돈이 된다’는 생각에서 자칫 모든 분야에서 복잡하고 거창한 세계관과 억지 스토리들이 남발되는 일이다. 물론 그런 세계관들은 곧 가라앉아 사라지겠지만 그동안 소비자에게 고통을 줄 테니 말이다. SF 작가 듀나는 영화 클리셰를 모아 설명하는 책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에서 말한다. “풋내기 SF작가들이나 판타지 작가들이 저지르는 가장 뻔한 실수 중 하나는 자기만의 우주를 창조해내는 작업이 뭔가 굉장히 대단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 이것은 역사에서 실존했던 시공간을 고증해서 재창조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노력도 적게 드는 일이라고. 세계관을 영리하게 만들어 활용하는 이들은 세계관을 캐릭터와 스토리에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녹여내는 반면에 “시작부터 요란하게 자기가 만든 우주를 광고해대는 사람들은 대부분 별 실속이 없다”고. 세계관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참고할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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