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서약했는데 캘리포니아서 온 딸이 반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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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의사의 책무는 질병을 치료해 목숨을 살리는 일이다. 그런데 죽음을 얘기하는 의사가 있다. 환자의 바람직한 삶의 마무리를 강조하고 심지어 영적 돌봄에도 관여한다. 전국 의대·심리학 교수 24명이 『죽음학 교실』(허원북스)이라는 묵직한 제목의 책을 냈다. 한국의 존엄사 운동을 이끌어온 산증인들이다.
죽음을 치료의 실패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있는데도 왜 의사가 죽음을 얘기할까. 대표 저자 고윤석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자문교수는 “사망 장소가 집에서 의료기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의료인이 생애 말기 돌봄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지난해 사망자의 75%가 병원·요양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숨졌다.
연락 않던 자녀 ‘끝까지 진료’ 요청
생애말기 갈등, 다양한 사례로 풀어
어버이날, 서약 내용 가족 공유 적기
본인 뜻대로 존엄사 37%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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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연명의료 중단이 합법화된 이후 21만여명이 존엄사를 선택했다. 사진은 신촌세브란스병원 한 병실의 모습. 김현동 기자
2018년 2월 연명의료 중단 합법화 이후 그간 21만 2881명이 존엄사를 이행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중 자신이 서명한 문서(사전 연명의료 의향서·연명의료계획서)에 따라 세상을 떠난 사람은 37.2%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자녀가 결정하거나 자녀가 부모의 뜻을 증언하는 형식이었다. 사전의향서는 생전에 존엄사 의지를 서약한 문서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36만 8998명이 작성했고, 지난 4년여간 127만명이 서약했다.
연명의료 중단이 당사자가 아니라 자녀에 달려있는 게 현실이다. 의사들은 환자와 자녀의 조정자가 될 때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녀가 부모의 사전의향서를 무력화시킨다. 12년간 류마티스관절염 치료를 받아온 75세 여성환자가 지난해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대학병원을 찾았다. 이미 폐가 딱딱하게 굳는 섬유화가 진행됐고 폐활량이 절반 밑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심장도 나빠졌다. 집에서 산소치료를 하다 다시 악화했다. 의료진은 “환자가 사전의향서를 작성했고, 상황이 더 나빠지면 연명의료가 무의미하다”고 자녀들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것은 시골에서 동네 노인들이 우르르 몰려가 뭔지도 모르고 서명한 것이니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병원에서 포기하라는 식으로 말하면 어떡하느냐. 왜 폐섬유화증을 치료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의료진은 경과를 자세히 설명했고 중환자실 치료를 권고했지만, 자녀들은 이를 거부하고 “더 큰 병원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담당의사는 병원 이동이 위험한 데다 어딜 가더라도 심폐이식 외는 치료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또 의식이 남아있는 환자에게 존엄사 뜻을 확인해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을 받았다. 환자는 심폐소생술 같은 걸 받지 않고 사흘 후 남편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환자는 존엄사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숨이 넘어가기 전에 존엄사 서류에 서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녀들은 어머니의 사전의향서를 모르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갈등이 없는 가정은 없다. 심하면 연락을 끊고 산다. 이런 경우 부모 임종기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뒤늦게 나타난 자녀가 “끝까지 치료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온 딸 증후군(Daughter from California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있다. 평소 오지 않던 캘리포니아의 자녀가 뒤늦게 나타나 뉴욕 부모에게 모든 치료를 다 해달라고 하는 경우를 말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10년 전 중풍을 앓은 86세 남자가 요양병원에서 심정지로 발견됐다. 거동하기 힘들어 누워만 지냈고, 의식이 명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료진과 환자 가족은 노환에 의한 사망으로 받아들이고 연명의료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장례식 후 평소 환자를 찾지 않던 자녀가 나타나 “왜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의료진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형제와 의료진을 고소했다(무혐의로 결론 남). 한림대 의대 김현아(내과) 교수는 “가족 관계가 복잡해지고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환자가 본인의 뜻을 명확하게 밝혀놓지 않은 경우 갈등이 생긴다”고 말한다.
부모의 사전의향서 뜻 존중해야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 유신혜 교수는 “고령의 암 환자 부부가 의료진과 지속적으로 논의해 항암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상태가 악화해 입원했다. 그런데 해외에 살면서 잘 오지 않던 자녀가 나타나 ‘끝까지 해달라. 심폐소생술도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소개했다. 유 교수는 “이럴 경우 환자 뜻을 토대로 자녀를 설득한다. 여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다”며 “설득이 안 되면 심폐소생술은 하고 중환자실 진료는 안 하는 식으로 타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면 환자의 뜻과 달리 임종의 질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조정숙 연명의료관리센터장은 “사전의향서를 작성했어도 자녀가 끝까지 치료해달라고 주장하면 어쩔 수 없다”며 “이럴 때를 대비해 가족이 모였을 때 사전의향서 등록증을 보여주며 연명의료 중단의 의지를 설명하고 자녀의 이해를 구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번 어버이날이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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