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창] 베네수엘라 따라가나…닮은 게 부동산 정책만은 아니다
입력2020.08.18 17:57 수정2020.08.19 00:28 지면A33
한국과 베네수엘라 정책 싱크로율은…
10여년 前 한국 좌파진영에선 "차베스에게 배우자"
수년 만에 '국가의 자살' 조롱받으며 경제·사회 파탄
그래도 차베스주의자들은 22년째 베네수엘라 主流
親노동·反시장 통해 권력 독점하고 재생산 '의구심'
백광엽 논설위원
어이없게도 10여 년 전 국내에서는 ‘베네수엘라 바람’이 거셌다. “베네수엘라가 인류를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고 있다”는 좌파 진영의 찬사가 넘쳤다. “노무현 대통령, 차베스에게서 배워야 한다”(조희연 서울교육감)는 식의 직설이 잇따랐다. 언론도 공범이었다. 소위 진보 매체들은 ‘한국에도 차베스 같은 지도자 필요’ ‘베네수엘라 모델로 신자유주의에 맞서자’는 주장을 쏟아냈다. 공영방송 KBS까지 현지 취재로 차베스 칭송에 앞장섰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 베네수엘라는 초유의 경제·사회적 파국을 맞았다. 지도자의 오판과 위선, 국민의 이기심과 무지가 빚어낸 ‘국가의 자살’(미국 포린어페어스)이었다. 한때의 ‘차베스 놀이’는 부끄럽고 민망한 기억으로 남고 말았다.
“차베스 따라 하나” 커지는 우려
그렇게 한국 사회 담론의 장에서 퇴출된 베네수엘라가 최근 다시 소환됐다. 대혼란을 초래한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이 베네수엘라와 ‘싱크로율 90%’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관심이 커진 것이다. 베네수엘라에만 있다는 ‘부동산감독기구’까지 연내 출범시킨다니, ‘어쩌자고 망한 차비즘(차베스주의)을 따라 하느냐’는 비판이 봇물이다. ‘베네수엘라 꼴 날 것’이란 오래된 우려에 콧방귀 뀌던 이들도 ‘이러다간 정말…’이라며 진지하게 정책 전반을 비교해보는 모습이다.
물론 한국과 베네수엘라 경제정책 간에는 괴리가 상당하다.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와 ‘세계 경제·방역 모범국’이니 당연히 달라야 정상이다. 하지만 집권 4년차를 맞은 정부가 부동산발(發) ‘연성(軟性) 차비즘’을 정책 전반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만만찮다. 차베스도 그랬다. 집권 초기에는 ‘가능한 한 많은 시장, 필요한 만큼 충분한 국가’라는 슬로건 아래 온건 노선을 폈다. 그러나 권좌에 오른 지 10여 년이 지나 정권이 탄탄해진 2010년 무렵부터 전매특허인 ‘국유화 드라이브’를 본격화했다.
정교한 재정 대책 없는 ‘퍼주기 복지’
구체적인 정책에서 차이가 크지만 국정 철학과 운영 방식에선 닮은 점도 많다. 방만한 재정지출에 의존한 복지 확대가 대표적이다. 1999년부터 14년간 통치한 차베스는 ‘서민생활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무상복지 확대에 올인했다. ‘미션’이라는 대대적인 서민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해 석유산업 국유화로 얻은 수입을 퍼부었다.
잠시 작동하는 듯하던 복지제도는 국제 유가가 급락하자 일시에 멈춰버렸다. 국가 조세재정 시스템이 붕괴되다시피 해 복지 재원은 금방 바닥났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수지 적자가 -31.8%(2017년)로 치솟았다. 차베스 집권 전 13년(1986~1998년)간 연평균 36%이던 예산 대비 ‘사회지출’ 비중이 집권 후 13년(1999~2011년) 동안 평균 61%로 치솟았다.
암으로 사망한 차베스를 이어 2013년 권좌에 오른 ‘차베스주의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도 현금 살포를 멈추지 않았다. 저유가로 돈줄이 말랐지만 차베스에게 배운 대로 돈을 찍어내고 국채를 남발하다 예정된 초(超)인플레이션을 맞고 말았다. ‘국가부채 비율 40% 유지’라는 오랜 불문율을 무시한 우리 정부의 모습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친노동·반시장과 부의 재분배
차베스는 고용·의료·주거를 ‘국가 책무’로 명시한 새 헌법을 만들고 ‘부의 재분배’에 집중했다. 2000년 144볼리바르이던 최저임금이 2010년 1224볼리바르로 8.5배 치솟았다. 하지만 드높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이 기간 실질 임금인상률은 14.3%에 불과하다는 분석이다. 경제의 악순환 구조만 키운 셈이다.
노동계층을 우군으로 삼기 위한 조치도 줄을 이었다. 신(新)노동법을 공포해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줄였고, 최고노동위원회라는 대통령 자문기구를 구성해 친(親)차베스 인사를 포진시켰다. ‘기업은 착취의 근원’이라며 대안으로 협동조합형 기업을 장려해 26만 개가 우후죽순 설립됐다. 세금 폭탄까지 떠안기자 기업인들은 국외로 빠져나갔고, 직장이 위태해진 100여만 명의 전문가가 썰물처럼 해외로 탈출했다.
반(反)시장 정책도 쏟아냈다. 가격을 올린 기업의 자산을 정부가 몰수할 수 있게 하는 ‘소비자보호법’이 등장했다. 가격 인상 시 정부에 보고토록 의무화하는 법안도 만들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이슈가 된 ‘공정가격 감독원’이 보고 대상 기관이다.
공공부문 확대 등 ‘포퓰리즘’ 치달아
‘복지집행에 필요하다’며 공무원 숫자도 마구잡이로 늘렸다. 2014년 공공부문 근로자가 노동인구의 29%에 달했다. ‘경제적·생산적 혁명 추진을 위해 불가피하다’며 기업을 국유화한 뒤 ‘노동참여경영제’를 도입했다. 민간기업에도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노동참여 경영을 독려했다.
포퓰리즘의 주요 속성인 반엘리트주의는 차베스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공통점이다. 엘리트가 빠진 빈 공간을 ‘차비스타’와 ‘문빠’로 지칭되는 열성 지지층이 파고드는 모습이다. 약자를 위한 변화를 앞세웠지만 차베스주의는 권력의 독점과 재생산을 위한 체제에 불과했다. 경제는 망했지만 주역인 차베스 주의자들은 22년째 집권 중이다. “권력을 독점한 뒤 약자에게 혜택을 베풀며 온정주의적 관계를 형성해 지지를 매수했다”는 게 차비즘에 대한 미국 카터센터의 혹평이다. 이런 평가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신 있는지 돌아볼 때다.
차베스주의로 GDP '반의 반토막'
세계 4위 경제대국서 빈곤국 추락
불과 반세기 전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꼽혔던 베네수엘라의 추락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극적이다. 196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3000달러로 미국(1만8000달러)과 경쟁하던 선진국에서 최악의 빈곤국으로 ‘광속 탈락’한 유일한 나라라는 평가가 나온다. 2014년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 작년까지 6년 연속 GDP가 쪼그라드는 초유의 기록도 써가고 있다. GDP는 2011년 3340억달러에서 2018년 980억달러로 뒷걸음질 쳤다. 지난해에만 39% 역성장했다. 10년 전 1만달러를 웃돌던 1인당 GDP도 지난해 2547달러로, 글자 그대로 ‘반의 반토막’이 났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 시절 누적된 문제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집권 이후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며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모습이다.
고장난 경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베네수엘라 의회에 따르면 2018년 물가상승률은 169만8488%에 달한다. 지난해에는 좀 진정된 게 7374%다. 빈곤층 비율도 2014년 48.4%에서 2017년 87%(61.2%는 극빈층)로 껑충 뛰었다. 인구의 17%인 530만 명이 살길을 찾아 국외로 탈출해 난민을 선택했다.
■ 정작 베네수엘라는
토지공개념 도입했지만 소득 안쓰고 다 모아도 내집마련에 151년 걸려
베네수엘라는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한 나라답게 토지 소유권에 큰 제약을 두고 있다. 우고 차베스는 집권 3년째인 2001년 TV쇼에 출연해 ‘토지소유자들에게 고한다’며 “토지는 개인 것이 아니라 국가 자산’이라고 선언했다. 그해 11월 이른바 ‘49개 개혁법안’이 전격 통과될 때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토지개혁에 관한 법’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5000ha 넘는 개인 토지 소유가 금지됐다.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국가가 압류해 소유권을 재분배할 수 있는 길도 텄다. 사유재산 침해라는 지적이 거셌지만 이후 상당량의 토지가 압수돼 빈곤층에 배분됐다. 땅이 없는 빈농이나 도시 빈민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조치는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불리는 차베스 개혁의 상징이 됐다.
베네수엘라가 토지공개념을 도입하고, 서민에게 주택 2000만 가구를 무상으로 지어줬지만 부동산시장은 극도로 혼란스럽다. 국민이 한 해 연봉을 전부 저축해 집을 사는 데까지 소요되는 기간이 베네수엘라는 무려 151.48년(2019년 기준)으로 압도적인 세계 1위다. 2위 홍콩(49.38년)보다 세 배나 길다. 토지가 국가 소유인 중국이 30.29년으로 3위다. 반면 자유시장체제인 미국(3.54년) 호주(7.68년) 독일(9.42년) 일본(12.83년) 등은 소요 기간이 훨씬 짧다. 토지 사유를 제한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부동산시장이 안정되기는커녕 버블이 더 심하게 나타난 셈이다.
한국의 부동산정책은 설마설마하는 와중에 베네수엘라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 여당은 토지공개념을 밀어붙이고 있다. 8·29 전당대회에서는 ‘토지재산권 행사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모든 국민의 안정적인 주거권을 보장하는 주거정책을 적극 추진한다’는 조항을 당 강령에 명시키로 했다. 차기 대선지지율 선두권이라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토지거래허가제’ 강행을 공언하고 있다.
힘으로 밀어붙여 통과시킨 ‘임대차 3법(전·월세상한제, 전·월세신고제, 계약갱신청구권)’이나 시·도지사가 임대료를 정하는 규제에서도 차베스의 향기가 물씬하다. 베네수엘라는 2011년 ‘임의적 퇴거금지법’을 제정해 임대시장 통제를 강화했다. 임차인이 새 주택을 얻을 때까지 퇴거를 요구하지 못하게 했지만 의도와 달리 임대주택 공급 감소만 불렀다. 30%에 달하던 임대주택 비율은 한 자릿수로 급감했고,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계층에 돌아갔다. 또 ‘부동산사기방지법’을 만들어 민간건설 프로젝트에 개입한 정책도 공급 부족을 부채질했다. 집값이 급등하고 자가 주택 소유가 더욱 어려워졌음은 당연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만큼은 확실히 잡겠다”며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패에 실패를 거듭 중이다. 결국 정부는 베네수엘라에서 하는 감시기구인 가칭 ‘부동산감독원’을 연내 출범시킬 작정이다. 부동산가격을 잡겠다는 것인지 시장을 잡겠다는 것인지 조마조마하다.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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