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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경험하는 메타버스 ‘꿈’
육신을 벗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꿈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신기하게도 현실과 연결된 꿈을 꿔봤을 것이다. 물론, 꿈이 지닌 예지력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대부터 꿈은 사람이 육체적 질곡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고대에 꿈에서 본 것은 현실과 거의 동일하게 간주됐다. 구약 성경에서도 야곱이나 다니엘의 이야기를 비롯한 수많은 장면에서 꿈은 현실과 비슷하거나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프로이트와 융이 꿈은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주장하기 훨씬 전부터 인간에게 꿈은 또 다른 세계를 실현할 유력한 도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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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만의 특수한 메타버스
꿈은 모든 사람이 꾸지만 잠을 통해 이뤄지고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반면 샤먼은 의도적인 의식을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 초능력을 발휘한다. 이런 샤먼의 특수한 상태는 ‘엑스터시’ 내지는 ‘유체이탈’이라고 불린다. 이따금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경험하는 ‘임사체험’에서도 비슷한 유체이탈 현상이 보고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매우 드물며 의학계에서는 단순한 환각이라고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샤먼들은 이런 유체이탈을 죽음이 아닌 자신의 의식에서 구현했다. 샤먼들은 다양한 환각제와 술, 그리고 제의를 통해 자신의 육체적인 틀을 벗어나 다른 세계를 여행했다. 그들의 흔적은 다양한 고고학 기록에 남아있다. 2600년 전 베이징 근처 만리장성에 살던 유목민의 무덤에서는 개구리 같은 양서류의 관을 쓰고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인물상이 발견됐다. 마치 VR 안경을 쓴 것처럼 보인다. 과거 사람들은 특히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와 양서류의 형상을 선호했는데, 이들은 물과 땅을 쉽게 오갈 수 있어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상징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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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이 구현한 가상세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바람은 죽은 자의 영원한 거처인 무덤으로 대표된다.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 믿지 않고 무덤을 저승의 거처로 다양하게 활용했다. 고구려를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서는 형이상학적인 기호와 모티브를 갖춘 벽화가 무덤의 방을 감싸고 있다. 최근 유행하는 수많은 가상세계의 배경에서 보이는 화사한 색감의 별천지에서 고구려의 벽화가 연상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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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가상의 모습을 섞어서 3차원의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메타버스의 세계는 바로 1500년 전 고구려 벽화 속에 들어 있었다. 고구려 벽화의 찬란한 예술세계는 무덤 속 주인공이 저승에서 진정한 메타버스의 세상을 살기 바랐던 고구려인들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고구려뿐 아니다. 세계 곳곳의 벽화와 바위그림은 죽음을 새로운 출발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메타버스로 구현한 결과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메타버스
이렇듯 현실을 떠나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인류의 바람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인간은 고대부터 각 시대에 맞는 자신만의 메타버스를 만들어 왔고 각자의 방법으로 즐겼다.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타임슬립이나 사람의 영혼이 뒤바뀌는 설정이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으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그 설정을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렇듯 메타버스는 최근 생소한 용어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예술과 역사의 발전을 함께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그것을 먹는 이의 소화력을 능가할 순 없듯이, 아무리 뛰어난 신기술이라도 우리의 육체적 능력과 오감 한계를 벗어날 순 없다. 메타버스를 구현하는 기술이 아무리 많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을 즐기는 인간의 신체적인 능력은 수만 년 전 초기 현생인류의 수준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기술의 발달에 환호하기 전 인류가 어떻게 메타버스를 갈망하며 만들어왔는지 신중하게 살펴봐야 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