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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정권 안보용인가

황태자의 사색 2022. 2. 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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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정권 안보용인가

중앙일보

입력 2022.02.04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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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홍 기자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문재인 정부 내내 한·일 관계는 수렁에 빠졌다. 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백지화한 데 이어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지지했다. 양국 관계는 파탄이 났다. 임기를 3개월 정도 앞둔 지금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佐渡)광산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는 외교전으로 비화했다. 한·일 정부는 각각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등재 실현과 반대에 매진하고 있다.

사도광산 문제는 일본 정부가 옹졸하게 처리한 혐의가 짙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사도광산에서 강제노역을 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일본 정부는 에도(江戶) 시대(1603∼1868년)까지만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며, 조선인 강제노역이 포함된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년) 이후는 제외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탄광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제 조건으로 강제노역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리겠다고 약속하고도 이를 여태껏 이행하지 않고 있다.

진영 논리에 따른 과거사 해석
한·일은 불신의 악순환에 빠져
갈등 풀어갈 리더십 실종 상태
비전 갖춘 지도자는 어디 있나

사도광산 논란은 한·일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한·일 관계가 원만하고 교류·협력이 원활했다면 양국은 소통 채널을 가동해 문제가 커지기 전 논란을 잠재웠을 것이다. 그러나 양국 정부는 갈등을 해결할 소통 창구나 정치 의지가 없는 상태다. 국민감정을 부추겨 국제무대에서 한판 벌일 태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싸고 한·일 역사전 무대가 된 일본 사도광산. [연합뉴스]

일본은 아베 정권 이후 우경화하며 한·일 관계 악화를 방치하고 있다. 양국 관계 악화가 일본 내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해 집권 자민당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민족주의 자극에 일본인의 반한 감정도 거세다.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현 아베파)의 실질적 수장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사도광산 등재와 관련해 “한국이 ‘역사전’을 걸어온 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의 우경화엔 문 정부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문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워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백지화했지만,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 지원은 거의 없었다. 이는 한·일 과거사 문제를 진영 논리로 재단하며 반일 감정을 부추겨 지지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가 깔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했다.

일본 우익 정치인들은 일본 국민의 민족주의 성향을 자극하는 데 문 정부의 반일 정서를 활용했다. 한국의 반일 정서와 일본의 반한 감정이 서로 부정적으로 되먹임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문 정부의 과거사 해석은 중국 정부의 피해주의 역사관과 일맥상통한다. 상하이의 한 전문대학 교사는 지난해 12월 수업 중 “1937년 난징대학살 때 일본군이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했다가 해직당했다. 이후 해당 교사의 해직이 부당하다고 주장한 여교사는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다. 난징대학살 사망자는 적게는 2만 명에서 많게는 30만 명으로 다양하다.

두 교사는 난징대학살 사망자 30만 명이라는 중국 정부의 역사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다가 핍박을 받았다. 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이 일제의 잔학 행위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선전한다. 특히 시진핑(習近平) 정부 들어 난징대학살과 아편전쟁은 중국의 ‘치욕의 세기’를 상징하며 더는 외국 세력에 굴욕당하지 않게 중국이 재부상해야 한다는 시 주석의 논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런 역사관은 적을 필요로 한다. 과거사에 발목이 잡히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한국이 이웃 나라 일본의 협력 없이 번영하고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 위상을 가질 수 있나. 한·일은 자유민주주의·인권·시장경제 등 가치와 이익을 공유한다.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일본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과거사나 영토 문제는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다. 그러나 비전을 지닌 지도자는 한·일이 윈윈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일본 총리는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통해 과거사 인식을 공유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했다.

오는 5월 새 정부가 출범한다. 새 대통령은 과거사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영 논리에 따른 과거사 해석은 결국 국민이 그 부담을 지게 된다. 새 정부는 집권 즉시 한·일 관계를 수렁에 빠뜨린 강제징용 문제에서 일본이 민감해하는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를 유예해 대화·협력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정치력이 한·일 관계를 좌우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