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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슬픔이 파도처럼 들이닥칠 땐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山으로 가자

황태자의 사색 2022. 2. 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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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슬픔이 파도처럼 들이닥칠 땐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山으로 가자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중국 사상가 장자의 ‘지락’
죽음의 슬픔에서 벗어나는 법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22.02.12 03:00
 
 
 
 
 

“아내가 죽었을 때 나 혼자 슬퍼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그렇지만 아내가 태어나기 이전, 태어나기 이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형태를 갖추기 이전, 형태를 갖추기 이전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氣)가 없던 때를 생각해보았네. 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신비의 한가운데서 변화가 일어나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태가 생기고, 형태가 변하여 태어나게 되었네. 그리고 이제 또 변화가 생겨 죽었네. 이는 춘하추동 사계절의 진행과 같네. 죽은 사람들은 조용히 크나큰 공간에 쉬고 있는데, 나만 슬퍼 소리 내어 운다는 것,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울기를 그만두었네(我獨何能無慨然. 察其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 而本無形, 非徒無形也, 而本無气.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时行也. 人且偃然寝于巨室, 而我噭噭然随而哭之, 自以爲不通乎命, 故止之也).” –장자의 지락(至樂) 중에서

미국 화가 샌퍼드 로빈슨 기퍼드(1823~1880)가 그린 ‘미국 메인주 마운트 데저트에서 스케치하는 화가’.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속담에 따르면, 수도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모여 살다가, 죽을 때는 한 명도 눈물 흘리는 사람 없이 죽는다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슬픔을 느낀다. 어떻게 하면 이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누군가 위로한다. “돌아가신 분, 참 대단한 분이셨어요.” 그러나 정치 사상가 해나 아렌트는 죽고 나서야 명예를 얻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싫어할 만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너무 슬퍼 마세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에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지금 여기’ 말고도, 인간이 가서 쉴 수 있는 좋은 곳이 있다면, 이 덧없는 인생은 슬프지 않으리라. 그 고단한 삶을 벗을 수 있으니 오히려 기쁘리라.

‘지금 여기’ 말고, 죽고 나서 가야 할 다른 곳이 정녕 있는가? 그리스도교는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이름으로 그러한 곳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고 하여도, 천국과 지옥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따라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따라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소설가 보르헤스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난 지옥을 잘 알아요…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단테와 달리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가까운 사람을 잃은 지옥 같은 마음 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고대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마침내 마음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아내가 죽자 장자는 슬퍼하기는커녕 통을 두드리며 노래한다. 애도는 하지 못할지언정 이건 너무 심한 짓거리가 아닌가. 아내의 죽음을 반길 정도로 그간 아내와 심하게 불화하며 살았단 말인가. 혹은 아내가 죽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어떤 신나는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장자는 대꾸한다. 사람이 죽으면,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법이라고.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뒤나 모두 삶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있냐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는데, 왜 죽었다고 새삼 슬퍼하느냐고. 이와 같은 장자의 위로에 공감하려면, 인생을 보다 큰 흐름의 일부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은 뒤의 상태뿐 아니라 태어나기 전의 상태까지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짧은 인생에만 집중하지 말고, 인생의 이전과 이후까지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인생이 봄이라면, 봄이 갔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봄은 그저 순환하는 사계절 흐름의 일부일 뿐. 인생도 그저 순환하는 에너지 흐름의 일부일 뿐.

 

영국 작가 조지 기싱도 장자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수상록’에서 기싱은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얼굴을 가린 운명의 여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끔 한 뒤 다시 침묵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이 운명을 수긍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 조지 기싱이 보기에, 삶과 죽음이란 인간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초월한 큰 운명의 힘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사람이 살다 죽었다고 한들 거기에 대해 수긍할 것도 거역할 것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을 마주하여 인간이 상심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인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이 운명일진대, 죽음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마치 운명에 대해 항의하는 것과 같다. 슬퍼하기를 멈추고, 거역하기 어려운 거대한 힘에 순응하는 것이 상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겸허한 태도로 거대한 힘에 순응하는 데도 각별한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장자가 말한 대로 생사를 보다 큰 흐름의 일부로 생각하려면, 시야를 확장할 수 있는 마음의 역량이 필요하다.

슬픔에 지친 나머지 그러한 마음의 힘을 낼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마음보다는 몸을 움직여 주변의 언덕을 오르는 것은 어떨까. 죽음의 기억이 자신을 압도할 때, 무의미와 슬픔이 파도처럼 들이닥칠 때, 절벽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덕을 오르는 중이라고 상상하라. 이렇게 시인 안희연은 권유했다. 슬픔은 마음뿐 아니라 몸을 침범하는 것이어서, 슬픈 사람은 절벽이나 수렁을 상상할 뿐, 언덕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절벽과 달리 언덕은 그 위에 시원한 바람을 이고 있다. 그리하여 언덕에 힘들여 오른다는 것은 그 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절망하지 않고 다시 언덕을 내려올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넓은 시야를 찾아 언덕을 찾아갈 계획이다. 언덕을 넘어 높은 산을 찾아갈 계획이다. 육신의 고단함 이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침범할 수 없도록 숨을 헐떡이며 아주 높은 산에 오를 계획이다. 계곡과 산마루를 지나 마침내 산정에 다다르면,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 실린 ‘시인의 말’을 떠올릴 계획이다. 시인 안희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러한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