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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퍼즐을 푸는 영웅…그러나 그도 인간이었다

황태자의 사색 2022. 3. 1.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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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퍼즐을 푸는 영웅…그러나 그도 인간이었다

3월 1일 개봉 영화 `더 배트맨`

복수·혐오에 휘둘리는
탈영웅적 배트맨 탄생기

`조커` `다크나이트`처럼
명작 반열 오를지 관심

  • 김유태 기자
  • 입력 : 2022.03.01 00:01:02   수정 : 2022.03.01 00:26:58

영화 `더 배트맨` 한 장면. [사진 제공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영화 '조커'를 기억하는지? '고담의 광대'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악의 당위성을 묘사한 이 영화는 주연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로 여전히 회자된다. 전설적인 영화 '조커'의 대척점에서 아직 관객이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던 다음 질문을 다룬 영화가 드디어 전 세계 극장을 찾는다.

그 질문은 이렇다. '왜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 될 수밖에 없었나?'

맷 리브스 감독의 신작 '더 배트맨'이 1일 개봉한다. 예매율 65%로 벌써 극장가 1위에 올라 적수가 없다. 상영시간 176분, 무려 3시간 동안 객석을 전율케 하는 영화를 시사회에서 미리 엿봤다.
이제껏 영웅 배트맨의 탄생 설화는 이랬다. '재벌가의 유일한 상속자가 부모의 피살 이후 선의 윤리를 정립하고자 밤마다 박쥐 가면을 쓰고 범죄자를 소탕한다.'

이번 영화는 1939년 DC코믹스에 처음 등장한 이후 80년 넘게 반복된 저 지루한 서사에서 벗어나 솔직해진다. 배트맨은 착한 세상 따위를 만들러 온 게 아니고, 복수와 혐오의 감정으로 고담시 판관을 자임했다는 것.

영화 줄거리는 이렇다. 박쥐 모자에 검은 슈트를 입고 밤마다 돌아다니는 배트맨에 관한 소문이 유령처럼 환상처럼 나돈 지 2년째. 경찰로부터 슈퍼 히어로로 인정 받지도 못했고 고담시민에게 알려진 인물도 아닌 상황에서 웨인가의 젊은 외톨이 상속자 브루스 웨인이 범법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밤마다 홀로 거리를 돌아다닌다.

어느 날, 얼굴 전체에 은색 테이프가 칭칭 감긴 고담시장이 질식사한 사체로 발견된다. 시장의 안면엔 피(血)로 '더 이상 거짓말 마(No More Lies)'라고 적혀 있다. 범인 리들러는 사회 최고위층을 순서대로 살해하면서 배트맨에게 쪽지를 남긴다. 그는 배트맨에게 호감이 있다.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의 살해현장을 쫓으면서 '탐정'으로서의 배트맨은 성장하지만 그 모든 단서가 배트맨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후 부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밝혀지면서 배트맨은 정의와 복수 사이에서 갈등한다.

배트맨은 선(정의)과 악(복수) 가운데 어느 길을 따를까.

지옥의 난수표처럼 얽힌 살인 퍼즐을 푸는 배트맨은 영화에서 영웅보다 거의 병자에 가깝다. 가면을 쓸 때마다 검은 아이라인 위로 흔들리는 눈빛이 더 선명하다.

희망을 걸어볼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이 배트맨은 추적과 처단에 골몰하지만 사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 앞에 놓인 건 몰락하고 있는 자신뿐이다. 배트맨 가면 너머 브루스 웨인이 어른거리는 이유다.

주연 배우 로버트 패틴슨도 "배트맨이 누구인가보다는 브루스 웨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극을 받았다"면서 자신의 배역에 관한 후일담을 고백한 바 있다. 또 리브스 감독은 "가족의 죽음 이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영화를 평했다.

배트맨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가장 흥분되는 볼거리였던 배트카 모습은 전작들의 과함으로부터 조금 살을 뺀 느낌이다. '스테로이드를 맞은 거대한 짐승'과 같은 '벌크업(근육 키우기)'한 배트카는 이번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맹렬히 질주하며 쩌렁쩌렁한 소음을 내기보다 침묵하는 듯 몸을 구부리다가 일순간 내리치는 뇌우처럼 뻗어나가는 분위기에 가깝다. 배트맨은 자신을 뽐내는 대신 다이어트에 성공한 배트카와 배트모빌을 타고 검은 반점같이 빠르게 번지는 악을 성실하게 지워나가는 데 열중할 뿐이다.

나오는 대사들도 심오하다. '내가 그림자 속에 숨은 것 같지만 내가 바로 그림자다' '나는 복수다(I am vengeance)' 등 대사는 객석의 머리 위에 얕지 않은 철학을 펼쳐 놓는다. 살인을 저지른 후 리들러가 배트맨에게 남긴 암호를 풀어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뒤틀린 연쇄 살인마가 그린 살인 지도에서 고담시 스스로가 만들어낸 부패한 역사의 청사진이 떠오르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나이트' 트릴로지(3부작), 또 앞서 설명한 토드 필립스 감독의 2019년작 영화 '조커'가 워낙 비교 불가한 명작으로 평가되는 까닭에, 이 영화가 그에 준하는 평가를 받을지는 객석의 준엄한 판단이 필요하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고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의 살 떨리는 악마성을 '더 배트맨'의 악인 리들러가 넘어서는 걸 기대하고 객석을 찾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그럼에도 영화 애호가라면 '용아맥(용산 CGV IMAX관)' 관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