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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되지 않기 위하여

황태자의 사색 2022. 3. 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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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되지 않기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2022.03.03 00:35

지면보기지면 정보

영혼이란 무엇인가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세월이 흘러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이 다 죽고 난 먼 미래. 그때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 시기 한국 사회를 어떻게 기억할까? 인구가 본격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한 시기? 전염병 퇴치를 계기로 국가 권력이 강화된 시기? 빈부의 양극화가 한층 더 심해진 시기? 다민족 사회라는 것을 마침내 인정하기 시작한 시기? 젠더 갈등이 심해진 시기? 결혼과 출산이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게 된 시기? 차별과 배제의 언어가 공정의 탈을 쓰고 전면에 나선 시기? 정부가 앞장서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라고 선포한 시기? 한국의 대중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간 시기?

그뿐이랴. 이 시기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드라마가 유난히 많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를 보라. ‘지금 우리 학교는’이나 ‘킹덤’ 같은 미니 시리즈는 “한국은 좀비 천지”라는 비유가 전 세계에 퍼지는 데 일조했다. 동시에, 이 시기는 영성(靈性) 혹은 영혼이라는 말이 공론장에서 유난히 자주 쓰인 시기이기도 하다. 신문 정치면을 보라. 정치인과 종교인의 밀착 관계가 조명되고 “영성 바르신 분이 끌어달라”는 문장이 대선 관련 뉴스 헤드라인으로 채택된다. 신문 사회면을 보라. 사람들이 “영끌해서”(영혼까지 끌어내어) 대출이나 주식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줄을 잇는다.

영혼 가진 인간이 꿈꾸는 이상은
이기심, 이타심, 제도적 설계만으론
도달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있어
“좀비가 다가가지 못하는 곳에”

성직자나 종교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영혼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영혼이다. 자식이 합격하게 해달라고 부모가 치성드릴 때, 부모 마음이 가닿는 곳이 영혼이다. (그 영혼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남의 자식은 불합격하게 된다) 자신이 당선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정치인이 기도할 때, 그의 마음이 가닿는 곳이 영혼이다. (그 영혼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른 정치인들은 낙선하게 된다) 수당·상여금·비상금·복지포인트는 물론 비금융권 대출까지 끌어와 투자할 때, 즉 ‘영끌’해서 투자할 때, 잔고 맨 밑바닥에 남아 있는 것이 영혼이다.

이처럼 사람마다 정의하는 영혼이 다르다. 진짜 영혼이 무엇이든,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좀비에게 영혼은 없다. 영혼이 있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다. 영혼은 인간을 좀비로부터 구별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좀비는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지도 않고, 정치 권력을 창출하지도 않고, 미래를 위해 재산을 투자하지도 않는다. 영혼이 없는 좀비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좀비는 몰려다닌다. 몰려다니기에 좀비는 외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좀비 사이에 소통은 없다. 좀비는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대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좀비는 모여 있어도 결국 혼자다. 떼지어 다니지만, ‘사회’를 이루지 못한다. 좀비와 달리 인간은 혼자 있을 때도 타인을 상상한다. 인간은 혼자 있어도 사회를 이룬다. 사회를 이루기는커녕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가리지 않고 물어뜯는 것이 좀비다.

좀비는 몰려다니지만, 협력하지 않는다. 협력하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다. 협력하기만 하면 상대를 좀 더 잘 뜯어 먹을 수 있으련만, 좀비는 결코 협력하지 않는다. 줄을 서지 않고 끝내 난장판을 만든다. 인간이 사회를 이룬다는 것은 질서를 만들어 인간끼리 협력한다는 것이다. 줄을 서지 않는 인간은 좀비가 되어 간다. 길에 침을 뱉는 인간은 좀비가 되어 간다. 협력하지 않는 인간은 점점 좀비가 되어 간다.

좀비는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이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다. 좀비는 생각하지 않기에 망설일 필요가 없다. 좀비는 생각하지 않기에 문해력이 필요 없다. 성찰하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다. 좀비는 그저 행동한다, 아니 그저 움직인다. 좀비는 자극에 반응할 뿐, 행동하지 않는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인간은 좀비가 되어 간다. 자극만 찾는 인간은 점점 좀비가 되어 간다.

좀비는 분주하게 자극을 찾아 나선다. 인간도 분주하게 일터에 나간다. 인간도 분투하고 좀비도 분투한다. 살려고 열심이라는 점에서는 좀비나 인간이나 다를 바 없다. 열심히만 산다고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좀비도 열심히 산다. 단지 추구하는 바가 한갓 생존에 불과한 것이냐, 아니면 의미 있는 삶이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좀비는 순간의 생존을 넘어서는 삶을 상상하지 않는다. 삶 너머의 삶을 상상하지 않는 인간은 점점 좀비가 되어 간다.

좀비는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다. 즉각적인 욕망의 만족 이상을 바라지 않기에 기도하지 않는다. 인간은 즉각적인 욕망의 만족을 넘어 보다 큰 희망을 갖기에 기도한다. 당장 그 희망을 실현할 현실적 방도를 알지 못해도, 그 희망에 마음을 조준하기 위해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인간에게는 한갓 생존을 넘어서려는 지향이 있기에, 삶의 의미를 묻는다. 왜, 그리고 어떻게 사는지 묻지 않으면서 사는 인간은 좀비가 되어 간다.

태어날 때부터 좀비인 인간은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좀비가 된다. 어떻게 좀비가 되는가?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삶의 의미를 도외시하고 한갓 생존에 연연하는 이들에 둘러싸이면 좀비가 된다. 좀비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좀비를 죽이다가 좀비가 되어 간다. 오랫동안 한갓 생존에만 집착하다 보면 좀비가 된다.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좀비에게 물리지 않아야 한다.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과 소통해야 하고, 협력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성직자들은 인간은 더 정직해져야 하고, 더 도덕적이 되어야 하고, 더 이타적이 되어야 하고, 더 너그러워져야 하고, 더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고 외쳐왔다. 그래야 우리는 좀비가 아니라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진짜 인간’이 되는데 실패해온 역사다. 인간이 이타적이 되는 데 실패한 역사다.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종교 지도자와 성자들이 인간들에게 이타적 삶의 길을 제시했건만, 인간들은 여전히 서로를 물어뜯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그뿐이랴. 이타적 삶을 권고하던 종교 단체들이나 사회운동가들조차 권력 앞에서 좀비가 되곤 했다. 인류의 명운을 건 이타심 고취 프로젝트의 결과가 기껏 이 정도라면, 인간은 결국 좀비가 되고 말 운명인지도 모른다.

절망은 이르다.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에 따르면, 인간이 모두 성자가 될 필요는 없다.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 특별히 이타적인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이타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직자를 만날 필요도 없다. 이기적인 인간을 제재하는 위협적인 정부가 존재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서로 간에 제로섬 게임만 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결국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것을 인간은 깨닫는다.

액설로드의 주장대로라면, 어쩌면 인간은 ‘제대로’ 이기적이지 못해서 좀비가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이기적 행동을 무리하게 막았기에 오히려 파국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각자의 이기적인 행동이 공적인 혜택을 낳기도 하고, 각자의 이타적인 행동이 공적인 파국을 불러오기도 한다. 개인의 선의가 꼭 전체의 공익으로 연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에 보면, 가난해서 도시락 없이 등교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전교의 급우들이 앞다투어 도시락을 싸다 주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주인공 책상 위에는 급우들이 가져다준 도시락이 산처럼 쌓인다. 산처럼 쌓인 도시락 앞에서 황망하고 창피한 주인공은 오히려 도시락을 먹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처럼 타자의 선의는 반드시 공익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이기심과 이타심이 잘 조화되어 긍정적인 결과를 낳으려면, 제도를 잘 설계하고 조율할 정교한 생각이 필요하다. 선한 의도나 이기심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덕적 호소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을 제도적으로 잘 관리하면 마침내 대통령 후보들이 공약하는 복지 국가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SF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따르면, 다수가 행복한 그런 복지 국가마저도 지하실에서 고통받는 한 아이의 희생 위에서 건설된다. 그 사실을 끝내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참을 침묵 속에 서 있다가 그 길로 복지 국가를 떠난다. 편의로 가득한 복지 국가를 떠나버릴 때, 그들의 가슴 속은 무엇으로 가득 찼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몰라도, 그 마음은 단순한 이기심도, 단순한 이타심도, 제도를 설계하는 합리적 사고도 아니었을 것이다. 떠나는 그 마음이야말로 영혼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좀비가 되어가는 인간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 어떤 것, 영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