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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아이들 60명 필사의 탈출 도운 미국인 기업가…어떤 사연 있길래

황태자의 사색 2022. 3. 5.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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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아이들 60명 필사의 탈출 도운 미국인 기업가…어떤 사연 있길래

우크라 아이들 60명 `필사의 탈출` 도운 아르멘 멜리키안씨

  • 고보현 기자
  • 입력 : 2022.03.04 17:43:15   수정 : 2022.03.04 20:12:31
◆ 러, 우크라이나 침공 ◆


미국인 사업가 아르멘 멜리키안 씨가 우크라이나 아이들 구조 작업 중 현지 상황을 알리기 위해 한국 사업가 지인에게 보내온 사진. 폭격을 맞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의 무너진 건물 지하실에서 어둠 속에 많은 어린이들만이 몸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 제공 = 이태석재단]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우크라이나식 발음)에서 폴란드 바르샤바까지는 784㎞. 자동차로 꼬박 9시간30분을 달려야 하는 거리다. 아르메니아 출신 미국인 사업가 아르멘 멜리키안 씨(43)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부터 차를 몰아 국경을 넘나들며 난민들의 탈출을 필사적으로 돕고 있다. 아이들과 난민을 자신의 9인승 승합차에 싣고 키이우에서 바르샤바까지 벌써 2번을 왕복했고, 폴란드 국경 마을까지도 5차례나 오갔다. 이게 아이들이 러시아군의 무차별 포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기에 그는 포화 속에도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마치 나치의 폭압을 피해 유대인들 탈출을 도왔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처럼 생사가 오가는 현장에서 구출 작전을 펼치고 있는 멜리키안 씨 사연이 그와 친분이 있었던 한국인 지인을 통해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재단(이사장 구수환)도 멜리키안 씨 사연을 전해듣고 지난 3일부터 우크라이나 어린이 긴급구호 캠페인을 시작했다. 멜리키안 씨 사연을 한국인 지인을 통해 재구성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살고 있는 멜리키안 씨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오가며 10년째 일하고 있는 사업가다. 현지에서는 어느 누구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습이 시작된 지난달 24일 이후 그와 함께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와 이웃들은 남자라면 모두 총을 잡았다. 결국 멜리키안 씨 주변에 남은 사람은 모두 여성과 아이들, 노약자들뿐이었다. 멜리키안 씨는 미국 국적이었기에 징집되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 순간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전쟁 포화 속에 멜리키안 씨에게 남은 것은 9인승 미니밴. 그날 이후 잠을 거의 자지 않고 매일 20시간가량 운전대를 잡고 폴란드와 키이우를 왕복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멜리키안 씨가 승합차에 태우고 우크라이나에서 탈출시킨 사람은 60명에 달한다.

폴란드로 가는 길이 막히면 헝가리로 방향을 틀어 우회하면서 그는 필사의 구출 작전을 감행했다. 멜라키안 씨의 승합차는 며칠이고 계속 달렸다. 멈추는 순간은 오직 차가 고장 나 수리할 때뿐이다.

"지금까지 바르샤바까지 2번 갔다 왔고, 폴란드 국경 마을도 5차례 오갔다. 내 차가 조금만 더 컸다면 더 많은 아이들을 폴란드로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멜리키안 씨는 전쟁 직후 최근 갑자기 연락이 끊겨 주변을 애타게 했다고 한국 사업가 지인은 전했다. '무슨 일을 당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지난 1일 드디어 녹초가 된 멜리키안 씨와의 영상통화가 성사됐다. 휴대폰 너머로 비친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고 머리는 산발한 상태였다. 그는 피난민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곧바로 키이우로 가야 하는데 우회할 때마다 돌아가는 시간이 길어져 발을 동동 굴렀다.

"폴란드에서 버스를 구해 우크라이나로 입국하려고 했더니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트럭은 군 수송용으로 오해를 받거나 공격받을 수 있어 위험했다. 결국 내가 가진 승합차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멜리키안 씨는 키이우 도심의 무너진 건물 지하에 숨어 있는 어린이들 얼굴이 떠올라 피곤할 틈도 없다고 전했다. 러시아군 폭격을 피해 숨어 있는 아이들은 탈수와 저체온증을 호소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치료조차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은 따로 없다. 무조건 한 사람이라도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뿐,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멜리키안 씨가 전하는 우크라이나 난민과 아이들의 참상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욱 참혹하다. 총을 들고나간 아이 아빠에 대한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생이별한 뒤 간신히 우크라이나를 탈출해도 난민 캠프 상황 또한 열악하기 그지없다.


멜리키안 씨가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준 우크라이나 여성과 아이의 모습. [사진 제공 = 이태석재단]
이태석재단은 멜리키안 씨 사연을 전해듣고 후원 기업인 중헌제약과 함께 긴급구호자금으로 2000만원을 지원했다. 이태석재단 관계자는 "멜리키안 씨로부터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우리가 행동할 때라고 생각했다"며 "일단 주변국으로 피신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국제구호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제일 큰 걱정은 아직까지 우크라이나 안에 갇혀 있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고보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