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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신작 소설 '페스트의 밤'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오스만제국의 29번째 국가 민게르섬. 사미 파샤 총독은 "공식적으로 전염병은 없다"고 굳게 항변하지만 술탄이 파견한 방역전문가의 매서운 눈에 섬은 바이러스에 삼켜진 뒤였다. 전염병의 혼란 속에서 행정부 관료는 이처럼 무능했고, 역병 속에 증식되는 건 인간의 불신뿐이었다. 그 사이 절망과 울분이 빈자리를 빠르게 채운다.
올해 세계문학 최고 기대작인 파무크의 새 미스터리 장편 '페스트의 밤'(민음사 펴냄)이 드디어 출간됐다. 파무크는 2006년 노벨상을 수상한 거장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세기가 바뀐 1901년, 이스탄불을 떠난 증기선이 로도스섬을 지나 민게르섬에 도착한다. 항구의 저편 아르카즈성의 우아한 탑이 보이는 민게르섬은 페스트가 창궐한 상태다. 증기선에서 황실 최고 권위의 화학자 스타니슬라프 본코프스키가 하선한다. 본코프스키는 이즈미르의 페스트 유행 당시 17명의 사망자만 내고 6주 만에 전염병을 종식시킨 방역전문가였다.
술탄의 명을 받아 그가 도착한 민게르섬은 이슬람교와 그리스정교 등 세계 종교가 뒤섞인 문명의 충돌지였다. 본코프스키는 정통 기독교인이었다. 현지인들은 그의 방역 조치와 격리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급기야 본코프스키가 길거리에서 피투성이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술탄은 이슬람교도 의사 누리 파샤를 다시 파견해 범인 추적과 방역 조치를 강하게 지시한다.
그 사이 술탄은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는다. 서구 열강에도 페스트가 옮을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술탄은 민게르섬 봉쇄를 하명한다. 이미 죽어버린 자와 이제 죽어갈 자. 섬에 남겨진 이들은 스스로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독립국가'를 선포한 섬은 어떠한 결말을 맞을 것인가. 그리고, 본코프스키를 살해한 범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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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무크는 "이스탄불에서 코로나19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고 훗날 기억을 털어놓았다. 이후 초고를 수정해 완성도를 높인 까닭에 800쪽에 달하는 묵직한 이 소설은 100년 전 오스만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임에도 2022년 오늘날의 역병 속 인간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보석처럼 숨겨진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된다. '소설은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 경험인 것처럼 쓰는 기술에 바탕을 둔다'는 문장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의 상황을 기억하게 하는 파무크의 회고에 가깝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문장을 첫 번째 장에 넣어둔 대목도 의미 심장하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 상황의 전체 흐름을 벗어나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이다. 위험이 닥칠 때까지는 괴로운 것을 외면하고 즐거운 것을 생각하는 편이 낫다.'
파무크의 11번째 소설인 이 작품은 터키에서 출간된 지 1년 만에 한국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영미판은 올 하반기에 출간될 예정이어서 한국 독자는 이 소설의 두 번째 독자층이 될 전망이다. 특히 이 소설은 작년 11월 터키 내에서 필화 사건을 겪었다. '페스트의 밤' 주인공 중 한 명인 카밀이 단기간에 주목을 받아 섬의 수장이 되는데, 이 모습이 터키 창시자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독했다는 주장이 터키 내 우파로부터 나오면서 터키 정부가 조사를 명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파무크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부인한 바 있다.
30년간 파무크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 '검은 책' '하얀 성' '순수 박물관' '눈' 등을 한국어로 번역해온 터키문학 전문가 이난아 번역가가 이번 책에도 참여했다. 책의 해설에서 이난아 번역가는 "파무크는 이 작품에서 음울할 수 있는 전염병 시대의 분위기를 흥미진진한 서사와 독특한 창작 기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며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파무크 특유의 작가 정신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고 평가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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