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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바타가 내 아바타에 몹쓸짓...처벌할 수 있을까

황태자의 사색 2022. 3. 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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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바타가 내 아바타에 몹쓸짓...처벌할 수 있을까

[WEEKLY BIZ] 맞아도 性추행 당해도 메타버스선 속수무책

입력 2022.03.10 18:30
 
 
 
 
 
아바타 왕따/일러스트=김영석

지난 1월 중순 SK지오센트릭에서 일하는 임직원 120여 명이 워크숍을 가졌다. 그들이 모인 곳은 일반 사무실이 아닌 메타버스(Metaverse·3차원 가상 세계). 모두 자신의 ‘아바타’(사이버 공간에서 사용자 역할을 대신하는 캐릭터)’를 통해 아침 10시부터 낮 6시까지 회의를 했다. 끝나고 뒤풀이도 벌였다. 예년 같으면 폭탄주가 오고 갔을 법한 자리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가상공간에 마련된 캠핑장에서 모닥불을 보며 서로 덕담을 나누는 것으로 끝냈다. 회사 관계자는 “일반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보다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를 내세워 회의하면 더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앞으로도 가상 세계에서 회의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고 했다.

메타버스가 삶의 전반에 침투하고 있다. 컨설팅 기업 PwC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메타버스 시장 규모는 약 1485억달러(약 180조원). 2030년이면 1조5000억달러(약 18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메타버스가 성장할수록 한편에서는 우려도 나온다.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 때문이다. 내가 내세운 아바타가 가상공간에서 폭행당하고, 사무실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바타 성추행, 처벌 가능할까

가상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는 어제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2003년 출시한 가상현실 게임 ‘세컨드라이프’에서는 아바타끼리 성추행하거나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6년에는 가상현실(VR) 게임 ‘퀴브이아르’에서 한 남성 이용자가 여성 캐릭터의 주요 부위를 만지는 행위를 시도했다. 피해자는 “예전 내가 스타벅스에서 실제로 성추행당했을 때 느꼈던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사건은 게임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졌지만, 최근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는 실생활과 밀접한 상황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부 스타트업의 경우 회사 직원이 자신의 아바타에 접속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아바타를 활용해 회의를 하고, 보고하고 난 뒤 퇴근할 정도로 실제 생활과 큰 차이가 없다.

지난해 12월 말, 미국의 메타버스 기술 연구업체 ‘카부니’의 니나 파텔 부사장이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성희롱을 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바타였다. 자신을 대신하는 아바타에게 남성 아바타 3~4명이 다가와 몹쓸 짓을 당했다는 것. 성범죄가 이뤄진 공간은 ‘호라이즌 월드’라는 가상공간이었다. 그는 “남성 아바타들이 내 아바타의 상체를 더듬으며 ‘싫어하는 척하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고 했다.

이 사건이 벌어진 뒤 가상 세계를 운영하는 ‘호라이즌(메타의 자회사)’은 지난달 아바타 간에 약 4피트(약 120cm)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바타 성희롱범을 처벌하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범죄 등을 어떻게 처리할지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개별 사례나 행위 양태, 피해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바타 사이에 벌어진 행위는 처벌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법무법인 태평양 강태욱 변호사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도 아바타를 조종하는 사람이 ‘가상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며, 아바타에게 무슨 인격이 있느냐’고 나오면 책임을 묻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가상 세계 관할권도 논란

설령 아바타의 인격을 인정한다고 해도, 가상 세계에서 저지른 행동에 실생활의 법이나 규칙을 적용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2019년 7월부터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을 도입했다. 그런데 특정 행동이 괴롭힘인지 아닌지를 놓고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가상 세계 사무실에서 일어난 괴롭힘은 판단이 더 어렵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현실에서 적용되는 고용 관련법을 가상 세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다. 당장 가상 세계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할 때 어디까지를 괴롭힘으로 봐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가령, 현실에서 직장 상사가 부하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머리를 때리는 행동은 당연히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 그런데 가상 세계 내 사무실에서 상사가 조종하는 아바타가 후배 아바타의 머리를 때린다면, 이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수 있을까. 강태욱 변호사는 “후배가 아바타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고 하면 괴롭힘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는 아바타가 실제 조종하는 상사와 밀접한 관계라는 게 인정되는 등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며 “괴롭힘으로 처벌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관할권도 분쟁의 소지가 다분하다. 넷플릭스나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의 경우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한다. 이들이 가상 세계 사무실에서 아바타를 내세워 일하다 보면 괴롭힘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어느 나라 법이나 규칙을 적용할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FT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근로자가 사전 통보 없이 해고될 수 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법원이나 국가기관의 승인 없이 직원을 해고할 수 없다. 이럴 때 어느 나라 법이 적용될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변승규 법무법인 세움 변호사는 “가상 세계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법을 적용하면 직장 상사가 유리하고, 한국 법을 적용하면 부하 직원이 유리할 경우 서로 자기한테 유리한 지역의 법을 적용하자고 주장하고 나설 수 있다. 가상 세계에서 분쟁 해결이 어려운 이유”라며 “국제적으로 합의된 규칙을 만들거나, 가상 세계에 규칙을 공지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식으로 해결할지 사전에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